"난 이리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수많은 명대사와 명장면을 남긴 드라마지만 나는 이 말이 제일 마음이 남았다.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
세상에 쓸모가 없는 것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는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따뜻하고 무해한 것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살았던 속초는 이름난 관광지라 평일과 주말 풍경에 큰 차이가 있다. 금요일 저녁부터 속초의 대형 마트들은 붐비기 시작하는데, 여행 내 먹을 음식들을 카트에 가득 싣고 계산대 앞에서 들뜨고 설레어하는 관광객들의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았다. 다들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묵는지, 맛집 천지인 이곳에서 무얼 먹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나 역시 속초에 놀러 왔던 때가 떠올라 함께 여행하는 느낌도 났다.
비록 성수기 해수욕장과, 설악산의 단풍은 전부 여행객들에게 양보해야 했지만 사람들이 몰리는 시기를 요령껏 피해 속초의 자연을 누리면 되니 그것쯤은 별 문제되지 않았다. 기운을 끌어올리고 싶을 때, 주말이 시작될 무렵 속초의 큰 마트에서 여행을 시작하는 관광객들을 보면서 함께 설레던것은 그 시절 누린 가장 무해한 기쁨 중 하나였다.
두 번째는 창문을 열었을 때 풍겨오는 이웃집 섬유유연제 향기.
아침저녁 환기를 위해 문을 열었을 때 이웃집 베란다에 널린 빨래들이 향기를 뿜어낸다. 그 향긋한 내음이 콘크리트 벽을 넘어 나에게로 전해지면 꼭 이웃집 행복이 나에게까지 번져 오는 것 같다. 잘 마주친 적 없는 이웃이지만 이렇게 향기로 인사를 나누니 반가울 따름이다.
어둠이 내린 도시에서 빛을 내는 아파트의 불빛과 퇴근하는 차량들의 불빛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추운 겨울에는 더 그렇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24층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기 아주 좋은 편인데, 소파에 앉으면 바쁘게 오고 가는 차들을 볼 수 있다. 저녁 여섯 시가 넘으면 저 멀리 보이는 다리를 건너오는 차들은 노란 불빛을 내고,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차들은 빨간 불빛을 밝히며 달려간다.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포근한 밤을 맞이하기 위해 점멸하는 불빛들은 기분 좋은 분주함과 두근거림을 선물한다.
때 묻지 않은 아이의 웃음에도 나는 따뜻하고 무해한 행복을 느낀다.
치료를 끝내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는 일이 많았다. 여러 번의 재발을 겪으면서 검진을 하는 일은 건강한 나의 몸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닌 어딘가 있을 또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이 돼버렸다.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기 위해 친정에 들르는 날에는 늘 조카 서후가 와있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서후는 소파나 가구를 잡고 더듬더듬 발을 옮기곤 했는데, 하루는 병원 일정을 앞두고 심란한 얼굴로 앉아있는 나를 한번 올려다보더니 씩- 웃어 보이는 게 아닌가. 네 개뿐인 앞니로 백만 불짜리 미소를 선보인 아이의 존재는 산란한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서후의 미소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오늘 병원 결과가 어떻든,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든 서후 미소만 생각하자. 환하게 웃는 서후만 생각하는 거야.'
이렇게 다짐하고 전쟁터에 나서는 장수처럼 비장하게 병원으로 향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뒤통수를 맞은 적이 여러 번이라 검진일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초조한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해묵은 감정들이 아이의 미소 한 번에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기적을 나는 몇 번씩이나 경험했다.
또 하나의 보석 같은 장면은 온화한 노인의 미소를 보았을 때이다. 성당의 미사 중에는 '평화의 기도'라고 하여 신자들이 서로 마주 보고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하며 인사를 나누는 순서가 있다. 앞, 뒤, 양옆에 있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가벼운 목례를 하는데, 용서와 화해를 통해 주님의 몸을 모시기에 합당한 상태가 되도록 준비하는 의식이다.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라는 사제의 말에 따라 신자들은 평화의 인사를 나누게 된다.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얼굴을 마주 보게 되는데, 흰머리에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한 분이 정성껏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해주셨다. 그녀의 눈빛과 미소에는 진심으로 상대방이 평화 안에 머물기를 바라는 기도가 담겨있었다. 그온화한 미소와 함께 날아든 정다운 인사에서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느꼈다.
손에 쥘 수 있는 것들 중 내게 가장 '따뜻하게 무해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책갈피와 엽서다.
여행지에 들를 때마다 기념품으로 꼭 사 오는 것이 바로 이 책갈피와 엽서다. 둘 다 가볍고,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도 추억의 장소를 자주 떠올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는 일은 내가 즐겨하는 일들이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자주 접하면서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엽서는 미니앨범에 넣어 보관하다 카드를 보낼 일이 있으면 하나씩 꺼내곤 한다. 받는 사람이나 목적에 맞는 엽서를 고르는 일은 마치 근사한 쇼케이스에서 제일 맛있는 케이크를 고르는 일처럼 즐거운 일이다.
책갈피는 그 소재와 크기가 다양해서 읽고 있는 책과 어울리는 제품을 선택하는 재미가 있다. 속초바다가 그려진 종이 책갈피, 일본 여행 중에 사 온 동백꽃이 수 놓인 책갈피, 아르메니아의 아라랏산이 그려진 나무 책갈피, 프라하 성 모양의 책갈피 등.
빳빳한 책 위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 책갈피는 '얼른 나를 집어 읽어달라'라고 조르는 아이 같다. 분주히 지내다 어쩌다 책장에 꽂힌 책갈피와 눈이 마주칠 때면 얼른 집어 책을 읽고 그를 구해줘야 할 것 같은 재미난 생각이 든다.
따뜻하고 무해한 것들은 우리 삶을 유용하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준다.
시름을 잊게 만드는 아이의 미소가, 굴곡진 세월을 이겨낸 노인의 평화로움이, 여행을 앞둔 관광객의 설렘. 그리고 바람결에 날아온 좋은 향기와 작고 귀여운 나만의 보물들이...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