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 나딘 스테어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 나딘 스테어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이번에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긴장을 풀고 몸을 부드럽게 하리라.
그리고 좀 더 우둔해지리라.
가급적 모든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보다 많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더 자주 여행을 하고
더 자주 석양을 구경하리라.
산에도 가고 강에서 수영도 즐기리라.
아이스크림도 많이 먹고 콩 요리는 덜 먹으리라.
실제적인 고통은 많이 겪게 되겠지만
상상 속의 고통은 가급적 피하리라.
보라, 나는 시간시간을,
하루하루를 좀 더 의미 있고 분별 있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리라.
아, 나는 이미 많은 순간들을 맞았으나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면 그런 순간들을 좀 더 많이 가지리라.
그리고 실제적인 순간들 외의
다른 무의미한 시간들을 갖지 않으려 애쓰리라.
오랜 세월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대신에
오직 이 순간만을 즐기면서 살아가리라.
지금까지 난 체온계와 보온병, 레인코트, 우산이 없이는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제 내가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이보다 한결 간소한 차림으로 여행길에 나서리라.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지내리라.
무도회장에도 자주 나가리라.
회전목마도 자주 타리라.
데이지 꽃도 더 많이 꺾으리라.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 생애 태어나면", "다시 태어나면"이라는 말을 썼다. 우스갯소리처럼 들렸겠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다시 태어나면 나 진짜 영어 안 배워도 되는 미국에서 태어나보고 싶어. 모국어가 세계 공용어고, 내가 쓰는 화폐가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엄청 글래머러스한 금발 미녀로 태어나는 거야. 집안도 좋고 뼈대 있는 가문 있잖아. 근데 막 공부도 잘해. 하버드, 예일, 스탠퍼드 이런데 척척 가서 전공은... 영미 문학으로 할까? 나 글 쓰는 거 좋아하니까. 아니면 뇌섹녀처럼 IT전공도 괜찮겠다. 예쁘고 착한데 능력도 있는 거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하면서 영화처럼..."
나는 마치 내일 일어날 일인 양 신나게 상상회로를 돌렸다. 어차피 다음 생인데 못할 게 뭐 있나 싶었다.
젊은 날 여러 번의 암 투병을 겪으며 상처가 늘어갔다. 천성이 밝고 명랑해서 겪은 일에 비해 우울은 덜했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였다. 몸과 마음에 상처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생각했다.
'다음 생애는 건강미 넘치고 매력적인 여자로 태어나야지. 한평생 암을 모르고 사는 무병장수의 사람. 아니다. 여자 안 되겠다. 자궁, 난소, 유방... 안 돼 안 돼. 그냥 남자로 태어날까?'
나는 언제나 진지했다.
병원에 다녀온 날 친구와 통화하면서 내가 또 이 말을 했나 보다.
"나는 진짜 다음 생애 태어나면, "
그다음에 온 친구의 말이 재밌었다.
"너는 이번 생이 좋았나 보다. 다시 태어난다고 하고. 나는 다시 태어날 생각이 없다."
아뿔싸
그럴 수도 있었다. 환생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었다. 삶을 선택에서 태어날리는 더욱 만무했다. 생각해 보니 나의 가정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가 없었다.
암이 재발하면서 일을 그만두고 낙향을 했다. 친구들과 내 인생의 시계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가끔 '이번 생은 망했으니'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주저 없이 '다음'을 꿈꿨다.
'다시 태어나면 뮤지컬 배우고 하고, 뭐도 하고, 어쩌고'
다 막 계속 뭐를 했다.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건 없었다. 태어나지 않는 건 아예 없었다.
친구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나는 '다 갖지는 못했어도 이번 생이 꽤 괜찮았나'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면 전에 참석했던 북토크에서도 그랬다. 어떤 책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마지막에는 한 명씩 돌아가면서 소감을 말하는 자리였다. 책에는 우울증이나 번아웃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의외로 '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살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던 적이 별로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심 놀라웠다.
나는 꾸준히 '장수'가 꿈이었기 때문이다. 안 아프고 오래 살면 좋을 텐데 이미 많이 아파버려서 유병장수로라도 오래 사는 게 내 꿈이었다. 이제 결혼도 했으니 남편이랑 행복하고 건강하게 백년해로 하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다. 욕심이 많은 건가. 다들 죽고 사는 일에 초연해 보였다.
사람은 자신이 겪은 일로 스스로를 구현하다. 나는 항상 살고 싶었다. 독한 항암제를 맞아 구역질을 하면서도, 빡빡 깎은 머리에서 수포가 나고 고름이 터져도, 손발톱이 들뜨고 얼굴이 까맣게 변해가도 너무 살고 싶었다. 쳐다보기도 싫은 항암 주사였지만 '내 몸을 살리는 약'이라고 생각하면 고맙기만 했다.
울고 웃는 와중에도 시간이 흘렀고, 건강한 몸으로 일어나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는 아침이 꿈만 같다.
켄터키주의 산골마을에 살았던 평범한 할머니가 썼다는 이 시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영혼을 위한 닭고기수프>에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욕망으로 가득 채운 나의 다음 생애와는 조금 다른 결이긴 하지만, 나 역시 그녀가 말하는 인생 철학에 동의하는 바였다.
모든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상상 속의 고통은 가급적 피하며, 오직 이 순간만을 즐기는 사람. 간소한 차림으로도 여행을 떠나고, 회전목마와 데이지 꽃을 자주 마주하는 삶.
어쩌면 이런 삶은 다음 생으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답도 없는 일에 고민하며 심각해질 때, 생각이 많아 시작하지 못하고 망설일 때, 미래에 있을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있을 때 나는 이 시를 읽는다. 비록 하버드의 금발 미녀는 못 될지라도 내가 가진 작은 행복들을 모아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석양이 잘 보이는 이응다리에 나가봐야겠다. 좋아하는 다크 초콜릿을 녹여 먹으며 남편 손을 잡고 강변도 걸을 것이다. 새삼 다시 태어날 일 없는 요즘이 감사한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