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 강릉> / 이정임
마음이 먼 곳으로 떠나는 날이 있다. 봄이 오면 연둣빛 물오른 버드나무가 흩날리는 방향으로 남대천 둑길을 걷는다. 풀을 뜯는 염소를 만나고 게이트볼 하는 노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을 스친다. 강변에 피기 시작한 꽃들에 정신이 팔려 주저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숨이 차도록 달리다 걷다 보면 어느새 강의 하구, 안목에 가 닿아 있다. 떠밀려온 강물이 바다와 섞이지 못하고 한참을 휘돈다.
해가 새들과 함께 바다를 등지고 서쪽으로 향하기 시작하면 안목 하구엔 그물이 던져진다. 잡으려는 것이 물고기인지 윤슬인지 눈앞이 희미해지면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사라지고 싶은 날엔 남항진 공항대교 난간에 서서 강물에 비친 그림자를 내려보거나, 내곡동 징검다리에 쪼그리고 앉아 물소리를 들었다.
(중략)
돌아오지 않는 강물을 바라보며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헤아리는 동안, 괴롭다고 여기던 것들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이 흐르듯 나도 흘러왔을 뿐이고, 해야 할 일을 했고 할 수 있었던 것을 하며 살았다는 것. 지나온 삶에 대해 미련을 둘 필요도 없고 평가할 일도 아니었다. 다시 흘러가면 되는 것이었다. 강이 바다에 이르듯 나도 언젠가는 바다에 이를 것이므로.
도시로 이사 온 지도 한 달이 되어간다. 체력에 맞게 천천히 이삿짐을 정리하고, 집을 꾸미고, 새로운 집에 적응하느라 분주한 날들이었다. 강릉을 떠나며
'이곳의 바다와 산과 소나무 숲이 너무 그리울 거야...'
아련하게 고했던 이별의 말도 잊어버릴 만큼 안온한 날들이 지나갔다.
사실 여기도 남편의 직장 때문에 2년간 거주한 적이 있었다. 어디 가면 뭐가 있는지, 어느 카페의 커피가 내 입에 맞고, 어떤 맛집들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전에 살던 곳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생활권이 달라졌다고 동네 요모조모를 탐색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바다와 숲은 생각보다 덜 그리웠다. 내륙지방에 살면서 제일 그리웠던 것이 바다라 강릉에 있는 내내 참새 방앗간처럼 다녔기 때문이다. 처음 살던 집은 전면이 바다뷰였고, 걸어서 3분이면 해변에 다다를 수 있는 곳에도 있었다. 출근길도 바다, 시내로 나가는 길도 바다, 혼자서도 바다, 손님이 와도 바다... 온통 바다였다.
오히려 사천 딸기 농장의 아카시아 꿀맛이 나는 딸기와 강릉의 신선한 공기가 그리웠다. 지금 사는 곳은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뿌연 날이 많아 오래 걸으면 목이 칼칼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날씨 탓이겠지만은, 큰 산이 병풍처럼 둘러친 동쪽 끝과 서쪽 내륙인 이곳은 공기 질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여보. 나 적응력이 좋은가 봐. 강릉 살았던 게 되게 옛날 같아. 엄청 그리울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막 그립고 그러지는 않다?"
라고 말하며 으쓱했던 게 엊그제.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경솔함은 항상 입에서 온다.
짐 정리도 집 꾸미기도 동네 탐방도 다 끝나자 스멀스멀 '강릉'에 대한 향수가 피어올랐다.
허구한 날 7번 국도를 따라 신나게 달리면 저 아래 동해, 삼척부터 양양, 속초, 고성까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었다. 꼭 령(嶺)을 넘어가지 않아도 강릉을 사이로 자연은 끝없이 축복이었다.
순두부, 물회, 오징어순대, 홍게살 비빔밥, 장칼국수, 막국수, 감자전, 닭강정, 전복 뚝배기, 매운탕, 지리, 꼬막무침, 감자옹심이... 맛있는 음식들은 왜 이리 많은지. 어지럽지만 않다면 2박 3일 모두 다른 종류의 해산물로 파티도 가능했다.
남편을 태워다 주던 출근길도 사천-하평-연곡-영진해변을 따라가는 길이라 일출이 아름다웠다. 퇴근길에는 수평선 너머로 휘영청 떠오르던 달님도 만날 수 있었다. 바람이 좋은 날에는 어김없이 파도가 장관이었다. 모퉁이를 돌면 일렁이는 파도에 탄성을 질렀던 것도 여러 번. 어떤 날은 햇살이 좋아서 길가에 차를 대고 무작정 모래사장을 걸어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비 온 후 숲 향기를 맡으러 솔숲으로 들어갔다.
생각이 날 때마다 세 시간은 족히 넘는 거리를 달려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나는 서재에 있던 '강릉'에 대한 책을 펼쳐 들었다. 작년 봄 우연히 들른 곳에서 구입한 책이었다. 인도식 밀크티 '짜이'를 파는 카페의 사장님은 강릉분이셨다. 다른 일을 하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가게도 운영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 강릉'이라는 제목의 책도 내셨다. 책에는 이곳에 오래 산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생활, 문화, 환경, 음식 등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이쪽 지방에서 잘 먹는 '지누아리'라는 해초, 감자전과 초당두부에 대한 추억, 남대천과 경포호, 대관령이 주는 여운들, 강릉 중앙시장의 역사, 강릉 단오제가 이곳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마지막으로 기승전 '바다'까지.
외지인으로 잠시 머물며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것들이 작가의 글을 통해 생생히 되살아났다. 리조또 위에 올라가 있던 '지누아리 장아찌'에 대한 호기심도, 몰랐다면 그냥 지나쳤을 굴산사지 당간지주와 신복사지 삼층석탑도 책을 읽으며 알아갔다.
그중에서 필사 노트에 옮겨 담은 '남대천의 시간'이라는 부분은 가장 좋아하는 문장들이다. 내가 찍은 사진 속에서도 남대천의 시간은 그대로 멈추어도 좋을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
강릉에서 바다를 걷다가 싫증이 나면 경포로 나갔다. 호수를 거닐고, 송림이 울창한 허균 허난설헌 생가터를 유유자적했다. 그러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역동적인 풍경이 보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안목으로 향했다. 산에서부터 흘러온 냇물이 강이 되어 흐르고 결국 바다에 닿는 신비로운 곳이었다.
갓길에 차를 대고 계단을 오른다. 강릉항과 남항진해변을 잇는 솔바람다리를 향해 둑방길을 걸으면 강 하구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물을 치고 낚싯대를 드리우며 세월을 낚는 사람들, 패들 보드로 사주(沙洲)를 건너는 낭만주의자도 만날 수 있는 곳. 다리 위에 서면 매번 거센 바람이 불었지만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만나는 모습이 신기해서 한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큼은 파도도 잔잔하게 달려와 강물의 손을 잡았다.
강릉항을 지나 안목해변으로 들어가면 차도 사람도 많아졌다. 강릉의 커피 거리. 경포와 더불어 강릉에서 제일 유명한 바다였다. 우리는 항상 반대편에의 남항진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적하고 조용해서 걷기 좋았다. 하늘 자전거와 집라인을 타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덩달아 신이나기도 했다.
천천히 물 구경을 하고 돌아갈 때의 하늘은 언제나 노을빛이었다. 이제 그만 집에 가라는 신호 같았다. 가는 길에 하등 아쉬움이 없었던 건 아름다운 경포호와 파아란 해변들을 차례로 지났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집에 가는 길도 여행이었다.
만질 수 없는 모든 것들은 그리움이 된다. 강릉에서 보낸 시간들도 고스란히 추억으로 남았다. 서울, 속초, 춘천, 세종, 강릉 그리고 내년 이맘때 어디가 될지 모르는 미지의 땅까지... 내가 머무는 모든 곳들이 겹겹이 쌓여 삶이 되고 글이 될 것이다.
강릉이 그리운 날 집어든 책에서 나는 잠시 잊고 지내던 풍경들을 발견했다.
언젠가 한 번도 떠난 적 없었던 것처럼 그곳에 머물다 올 것이다. 남대천의 노을도 경포호의 왜가리와 흰뺨검둥오리도 모두 제자리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