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마을 다이어리

해변가 주민의 가장 쉬운 선행

by 윤이나


오늘은 원래 서울에서 친구가 내려오기로 돼있었는데, 감기 이슈로 불발되었다. 친구 컨디션이 안 좋기도 했고 나도 지금 몸 상태가 백 프로는 아니어서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강릉에서 못 보는 건 아쉽지만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니까!


속초에 살 때도 세종에 살 때도 항상 먼 길을 와주었던 친구인데, 나랑 mbti가 같아서 그녀가 왜 이렇게 마음을 쓰는지 잘 알고 있다. 참고로 나는 한 십 년간 ENFJ였다가 ESFJ로 바뀌었다가 결혼하고 최근에 해보니 ISFJ가 (E: 40 I: 60) 되었다. 남편을 따라 지방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사니 아는 사람도 없고, 인간관계 확장에 대한 욕구도 딱히 없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과 편하게 연락하며 지내다 보니 어느덧 혼자가 더 좋은 나이가 되었다. 항상 사람을 먼저 찾고 누구에게나 잘해주려고 애쓰던 내 모습도 다 옛날 얘기다. 이제 그럴만한 에너지가 없기도 하고ㅎㅎ 역시 선택과 집중이 최고다.



오늘은 해변가에 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선행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한다. 주문진에 살 때는 전면이 통창 바다뷰였지만 사실 바다까지 나가려면 굽이굽이 주문진 수산시장을 통과해야 비로소 방파제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주문진 항구와 주문진 해변 내지는 해수욕장은 또 다른 장소였기 때문에 물놀이나 산책이 가능한 다는 차를 타고 이동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사는 이곳은! 바다가 정말 3분 컷이라 운동복에 슬리퍼 끌고 나가도 동해안 망망대해가 품 안에 들어온다. 해변가 주차 걱정도 없고, 물 놀이 하고 바로 들어와 씻으면 그만이다.


한여름 피서철이 지나고 9월부터 나는 종종 바닷가에서 맨발 걷기를 했다. 숙이님을 만나고 온 후로부터는 날씨가 선선해도 햇빛을 받은 모래사장은 따뜻해서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열심히 어씽을 이어갔다.

12월 중순 온도가 10도 밑으로 떨어지기 전까지는 충분히 걸을만했다. 적당히 물기 있는 모래를 밟으면 되는 거라 꼭 바다에 발을 담글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물기 묻은 발에 찬 바람이 불어와 더 시렸다. 체온이 낮아지는 것 또한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겨울이 될수록 최대한 물가 근처의 마른 모래를 밟았다.


사천 해변에는 세족장도 있어 아주 편리했는데, 한 번은 세족시설 근처에서 모래사장에 파묻혀 있는 신용카드를 발견했다. 뭔가 반짝해 무심결에 주워 들었는데 카드였다. 두고 가자니 찜찜해서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다. 상담원은 어디서 주웠는지 그리고 나에 대한 간단한 신상 정보도 묻고, 주인에게 연락해 보겠다고 했다. 얼마 뒤 주인과 통화가 됐고 카드 폐기 후 재발급받는 걸로 상황은 종료됐다. 신고해 줘서 고맙다고 말씀해 주셨다.


비슷한 일은 또 있었다. 이 날은 처음으로 혼자 바닷가에서 플로깅을 한 날이었다.


긴 투병의 역사(?)에서 나는 산이 한 번, 바다가 한 번 나를 살렸다고 생각한다. 2017년 폐 수술을 받은 뒤 한 달도 안 돼 속초로 이주했다. 그리고 서서히 몸을 회복했을 즈음 다시 유방암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6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폐 수술하고는 엄마 걸음도 못 따라갔는데, CMF 항암치료를 하면서 일주일에 세 번은 설악산을 올랐다. 당시 내 체력으로 흔들바위까지 왕복으로 2시간 조금 넘게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강릉으로 이사와 방사선 부작용으로 인한 심장+늑막 삼출 이슈로 열심히 바닷가에서 맨발 걷기를 하고, 식이 요법, 기도와 명상을 통해 조절해 나가고 있다. 참 고마운 설악산과 동해 바다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강릉을 떠나기 전에 쓰레기라도 줍고 싶었는데, 그날이 마침 D-day였다.

30분 정도 어씽을 하고, 준비해 나간 종량제 봉투를 펼쳤다. 야무지게 손에 라텍스 장갑도 끼고 떠밀려온 스티로폼이며 밧줄, 사람들이 버리고 간 테이크아웃 컵, 휴지 등등을 주워 담았다. 그런데 그때 내가 좋아하는 오렌지 빛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엄밀히 말하면 능소화의 붉은빛이었다. 벽돌인가 싶어 가까이 가보니 모래사장에 반쯤 묻힌 지갑이었다. 현금이 삐죽 나와있었다.

'오잉?'

지갑을 들어 살펴보니 신분증도, 신용카드도 없고 현금만 있었다. 5만 원짜리와 1만 원짜리 지폐로 총 10만 원 그리고 동전이 가득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평일이라 아무도 없고, 아까 운동했을 때도 이곳에는 사람이 머물지 않았다. 발견 위치가 쓰레기통 뒤라 누가 잘못 버렸나 싶기도 했다. 지갑을 바로 옆 바위 위에 올려놨다.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봤지만 주인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경찰서도, 우체통도 없었기에 급한 대로 남편에게 전화를 하고 (남편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경찰인 후배에게 연락을 했다. 상황을 설명하니 112에 전화하면 경찰이 금방 찾으러 올 거라는 거였다.


휴대폰에 '112'라는 숫자를 누르니 기분이 이상했다. 바로 통화연결을 하니 상황실에서 전화받는 여직원분이 다급한 목소리로

"위치가 어디시라고요?" 하길래

"아 다름이 아니라 현금만 들어있는 지갑을 주웠는데, 제가 지금 차도 없고 근처에 경찰서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연락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경찰관이 곧 이쪽으로 올거라고 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니 비로소 날이 춥다는 게 느껴졌다. 주섬주섬 장갑을 꼈다. 집 앞에 맨발 걷기 하러 나와서 갑자기 쓰레기 줍다가 지갑을 주운 동네 아낙의 몰골로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생각했다. 출동한 경찰에게 전화가 올 수도 있다고 해서 벨소리로 바꿔놓고 뻘쭘하게 서있는데, 맞은편 가게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한국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국적인 느낌의 여자였다. 머리에는 두건도 하고 앞치마도 입고 있었다. 여자는 웃는 얼굴로 양손을 들어 네모를 그려 보였다.


"지갑. 그 지갑."

"어! 이 지갑 잃어버리셨어요? 신분증이 없어서 제가 경찰에 신고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는 자신은 저 식당에서 일하고 있고, 여기서 지갑을 분실했는데 다행히 내가 지갑을 갖고 있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강릉은 음식점에서 일하는 외국인 분들이 많은데, 이제야 카드나 신분증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이해가 갔다. 그녀에게 지갑을 돌려주고 다시 112 번호를 눌렀다. 다행히 출동하고 있는 경찰관에게 바로 연결이 돼서 상황 설명하고, 신고 취소하는 걸로 종료되었다.


지갑을 돌려주고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경찰차 한 대가 스쳐갔다. 이곳으로 오고 있던 그 차였나 보다. 새삼 우리나라가 참 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닷가에 살면서 모래사장에서 주운 분실물이 꽤 많았다. 주로 카드, 지갑 같은 거라 신고하거나 주인을 찾아주려고 했다. 한동안은 바다에 매일 갔으니 내 눈에만 유독 잘 띄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잃어버린 물건 주인 찾아주는 게 바닷가 사는 주민의 손쉬운 선행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는 애석하게도 날씨가 너무 추워져 어씽을 가지 못했다.

차로 지나다니면서 바다도 보고, 바닷가 옆 산책로를 걸으며 운동은 해도 촉촉하고 까실한 모래사장을 직접 느끼는 건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선업이 쌓이면 언젠가 다 돌아온다고 믿는다. 엄마 말대로 '선한 끝'은 반드시 있다고도 생각한다. 핸드폰 한 번, 지갑 한 번 잃어버린 적 없는 나라도 입장 바꿔 생각하면 다행인 일 아닌가. 모쪼록 사람들이 강릉에서 좋은 기억만 담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