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선약수(上善若水)

강물 / 오세영

by 윤이나


강물 / 오세영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에서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물'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강물처럼 순리대로 흐르는 삶. 애쓰지 않고 다투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뽐내지 아니하며 낮은 곳으로 흐르다 끝내 '바다'에 이르는 저 강.


오세영 시인은 '강물'이라는 시를 통해 절벽에 막히면 돌아가는 강물의 유연함을, 작은 연못에서 쉬어갈 줄 아는 폭포의 여유를 말한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르는 것처럼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는 것이라고.




치병생활을 하는 동안 자연 가까이에서 생활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몸과 마음에는 전에 없던 생기가 돌았고 도시에서 분주하게 회사생활을 하며 얻었던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몫이었다. 나는 매일 들로 산으로 호수와 바다로 도망쳤고, 자연은 언제나 넉넉한 품을 내어주었다.


작년 한 해는 강릉에서 생활하며 부지런히 바닷가를 걷고 사천천 둑길을 달렸다. 한 여름 피서객들이 떠난 9월부터 12월 중순까지 매일 사천해변을 맨발로 걸었다. 바다는 매일 다른 모습이었는데 어느 날은 파도 하나 없는 잔잔한 모습으로 또 어떤 날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나를 반겼다. 촉촉한 모래사장을 밟으며 부딪치고 산산조각 나는 게 일인 파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거품이 나도 바다는 늘 초연했다.


한겨울에 접어들자 양말을 벗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기 없는 곳을 골라 걸으면 그만이었지만 칼바람이 불어와 살을 에는 것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한낮의 태양은 여전히 따스했기에 뚝방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조금만 걸으면 '사천천'이 있었다. 논밭 사이를 가르는 작은 천은 유유히 흘러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하천가에는 철 모르는 개나리가 꽃망울을 틔우고 있었고 비오리 떼, 백할미새, 청둥오리 가족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겨울이 한창이라 군데군데 살얼음이 얼었지만 곧 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스르르 녹아 가던 길을 가겠지.

연세 지긋한 강태공들이 세월을 낚는 곳. 눈을 들면 오대산 자락이 만년설처럼 펼쳐진 곳이 사천천이었다.


항상 라디오를 들으며 산책하는 나도 강가를 걸을 때만큼은 이어폰을 끼지 않는다. 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약간의 단차가 있거나 좁은 수로를 통과할 때면 물은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른다. 잔잔한 호수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다. 서라운드 효과음처럼 다가오는 바다에서도 만날 수 없는 가볍고 경쾌한 소리를 강에서는 들을 수 있다.


이사오기 전까지 매일 강가에서 걷기 명상을 했다. 어떤 날은 묵주를 들고 기도로, 어떤 날은 물소리와 호흡에 집중하며, 또 어떤 날은 강에 사는 생명들을 관찰하며 행복했다. '댕기물떼새'처럼 이름도 외모도 귀여운 새를 마주할 때면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는 게 일이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 온 지금도 가장 많이 떠오르는 강릉 풍경은 사천천의 평화로운 정취다.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강가의 갈대, 뚝방길의 꽃들, 철마다 찾아오는 철새들 가득 품은 강물은 얼지도 않고 내 마음을 흐르고 있다. '졸졸졸' 싱그러운 물소리에 금방이라도 개구리가 깨어날 것만 같다.




새 보금자리를 튼 곳에는 '금강'이라는 큰 강이 흐른다. 강변을 가득 메운 황매화의 계절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천국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강 위로는 웅장한 위용을 뽐내는 다리들도 여럿이다. 합강 습지에는 흑두루미와 재두루미가 온다는 사실을 엄마에게서 이미 들은 소식이었다.


살기 좋은 곳에 언제나 물이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물가에는 마르지 않고 흐르는 생명력과 역동성, 에너지가 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생명이 있는 것들의 젖줄이 되어주고, 힘들 때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휴식처도 된다. 가만히 '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강물은 이치를 안다. 바위를 만나면 피해 가고 둔덕을 만나면 돌아간다. 나뭇잎, 꽃잎, 때로는 누군가가 버린 쓰레기도 안고 흐른다. 그렇게 흐르고 흘러 결국 바다에 이른다.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는 노자의 말처럼 나도 무심하게 흘러 더 넓은 세상에 다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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