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자리 새 자리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 법정 스님

by 윤이나

◉ 나무가 나에게

폭풍우가 휘몰아치던 날, 가지 끝에서 재잘거리던 새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어디론가 모두 날아가버렸다. 그런 날 사람들은 저마다 뒷문을 굳게 닫고 휘장을 내린다.

섬돌 위에 신발이 젖을까봐 안으로 들여놓는다.

이때 나무들은 제자리에 선 채 폭풍우를 맞이한다.

더러는 가지를 찢기면서, 잎을 펼치면서 묵묵히 순응하고 싶다.

의연한 그 모습에 우리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 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은 채 덤덤히 서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땅의 은밀한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새 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시절 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 대지 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


◉ 눈꽃

잎이 져버린 빈 가지에 생겨난 설화를 보고 있으면 텅 빈 충만감이 차오른다.

아무것도 지닌 것 없는 빈 가지이기에 거기, 아름다운 눈꽃이 피어난 것이다.

잎이 달린 상록수에서 그런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거기에는 이미 매달려 있는 것들이 있어 더 보탤 것이 없기 때문이다.

◉ 봄 여름 가을 겨울

봄에는 파랗게 움트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자라고, 가을에는 누렇게 익으라.

그리고 겨울에는 말문을 닫고 안으로 여물어라.

이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 아니겠는가.


◉ 태초에 말씀이 있기 전에 무거운 침묵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생명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자연에는 꽃이 피고 지는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침묵이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는 벽돌과 시멘트로 쌓아 올린 교실에서가 아니라, 때 묻지 않은 대자연 속에서 움트고 자랐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맑고 담박한 법정스님의 글을 좋아한다. 특히 스님께서 벗 하셨던 자연에 대해 묘사해 놓은 글을 읽을 때면 작가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 알 수가 있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꽤 많은 구절을 필사한 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자연이 가르쳐 준 위대한 진리에 대한 부분을 모아보았다.




강릉에 있는 강원도립대는 영진해변가에 자리하고 있다. 학교 건물과 영진 바다를 사이에 두고 큰 송림이 조성되어 있는데, 고운 모래로 흙이 깔려있어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출근하는 남편을 차로 내려주고 나는 항상 도립대 솔숲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 소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의 향연이 하루의 시작을 싱그럽게 만들어 주었다. 산책로 초입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두고 맨발로 땅을 디디면 가실가실 부드러운 흙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간지럽혔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소나무 숲을 걷는다. 하늘 높이 기지개를 한 번 켜면 고단함은 모두 날아갔다. 아침 햇살이 나무 사이로 들어와 눈이 부셔도 '태양의 정기'를 받는다고 생각하며 가슴을 더 활짝 열곤 했다.


봄에는 아카시아 향기가 여름에는 연못 가득한 수련이 가을의 서늘한 바람과 눈 내린 솔숲의 풍경이 친구가 되어주었다. 비가 온 다음 날에는 흙냄새, 나무 향기가 더 진하게 우러나와 심호흡을 크게 하며 행복해했다. 자연이 주는 그 행복을 포기할 수 없어 가는 비에는 우비를 걸쳐 입고 걸었었다.


그러다 우연히 매일 걷던 그 길 위에 피어있던 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 산책로가 조성된 길 한가운데였다. 소나무도, 아카시아도, 수련도 다 제 자리에서 피었는데 풀씨가 날아와 인도 한가운데서 싹을 틔운 것 같았다. 꽃 이름은 있겠으나 잡풀처럼 흔한 작고 하얀 식물이어서 무어라 불러줄 수는 없었다.


"어머. 여기 이런 꽃이 있었네. 그동안 왜 못 봤지? 안녕? 왜 여기서 자라고 있어. 사람들 많이 다녀서 밟힐 수도 있는데. 저기 옆에 꽃들 많이 피어있는 안전한 곳에 있지..."

나도 모르게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작고 낮게 피어있어도 걷는 길 한복판이었는데, 어떻게 사람들의 발망치를 다 피했는지 녀석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 후 소나무 숲에서 산책할 때마다 이름 모를 작은 풀꽃과 눈맞춤 하며 인사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고, 비가 많이 오거나 운동을 가지 못한 날에는 갸녀린 생명이 잘 버티고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꽃이 무성한 곳이나 푹신한 잔디밭에서 자랐으면 좋으련만, 하필 뿌리내린 곳이 산책로 중간이라는 게 나는 못내 아쉬웠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보는 나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정작 그 자리에 둥지를 튼 풀꽃은 아쉬운 기색도, 두려운 기색도 전혀 없이 홀로 초연했다.


꽃도 나무도 피어난 자리에 불평이 없다. 길가보다 더한 절벽이나 물가, 언덕 위에서 뿌리를 드러내고 위태롭게 자라더라도 살면 그만이지 한 마디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다. '누가 날 밟으면 어쩌지, 오늘 베어지면 어떡해, 비가 많이 와서 쓸려내려가면 안되는데, 벼락 맞아 부러지기 싫다.' 이런 걱정은 인간만 하는 것 같다.


식물들은 뿌리내린 자리에 순응하며 자연의 법칙대로 살아간다. 오래 사는 일도 병충해를 입지 않는 일도 자질구레한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살다가 그렇게 간다.

꽃나무와 사람의 인생이 어찌 같겠냐마는 대단히 다를 것도 없는 게 자연의 이치다. 모두 조물주가 만든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강릉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솔숲에서 걸으며 본 풀꽃은 겨울나기 위해 꽃을 떨구고 여린 줄기를 메말린 모습이었다. 바싹 말라 누렇게 변한 동양란의 이파리 같았다. 봄이 되면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대지의 영양분을 빨아들여 다시 푸르고 건강한 꽃대를 만들 것이다. 그 순간을 함께할 수는 없겠지만 이름 모를 풀꽃 한 송이가 알려준 교훈은 강릉을 떠나온 지금도 가슴속에 잘 묻어두고 있다.


가끔 내 상황에 불만스러운 마음이 생기거나 더 나은 조건과 비교하며 투덜거리게 될 때, 작고 낮게 핀 그 꽃을 생각한다. 완벽한 인생은 아니지만 비바람 불면 떠내려 갈 걱정도, 흙 묻은 신발에 밟힐 일도 없는 삶인데. 부정적인 생각에 오래 메이는 건 사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이 주는 단순한 진리에 고개가 숙여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