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십계명 / 찰스 스펄전
1. 생각이 곧 감사다.
생각(think)과 감사(thank)는 어원이 같다.
깊은 생각이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2. 작은 것부터 감사하라.
바다도 작은 물방울부터 시작되었다.
아주 사소하고 작아 보이는 것에 먼저 감사하라.
그러면 큰 감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3. 자신에게 감사하라.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은 높은 산과 태양과 별들을 보고 감탄하면서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감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4. 일상을 감사하라.
숨을 쉬거나 맑은 하늘을 보는 것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감사가 어려운 감사이다.
5. 문제를 감사하라.
문제에는 항상 해결책도 있게 마련이다.
6. 더불어 감사하라.
장작도 함께 쌓여 있을 때 더 잘 타는 법이다.
가족끼리 감사를 나누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돌아온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
결과를 보고 감사하지 말라.
문제 앞에서 드리는 감사가 아름답다.
8. 잠들기 전 시간에 감사하라.
대부분의 사람이 짜증과 걱정을 안고 잠자리에 든다.
잠들기 전의 감사는 영혼의 청소가 된다.
9. 감사의 능력을 믿고 감사하라.
감사에는 메아리 효과가 있다.
감사하면 감사한 대로 이루어진다.
10. 모든 것에 감사하라.
당신의 삶에서 은혜와 감사가 아닌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별빛에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을 주시고, 달빛에 감사하는 자에게 햇빛을 주시고,
햇빛에 감사하는 자에게 영원히 지지 않는 주님의 은혜의 빛을 주신다.
-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1834-1892, 영국 침례교 목사, 설교가)
맑은 날 자연 속을 걷다 보면 저절로 흥얼거리고 있는 노래가 있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다. 어린 시절 번안곡으로 배운 노래인데 가사가 아름다워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로운 조물주의 오묘하신 솜씨를
우리들의 무딘 말로 기릴 줄이 없어라.
봄비 맞아 움터 나는 나뭇잎을 보아도
햇살 안고 피어나는 봉우리를 보아도.
영화로운 조물주의 오묘하신 솜씨를
미물들도 입을 열어 정성으로 기리네.
하늘 나는 저 새들도 풀잎 사이 벌레도
노랫소리 즐거워라 아침이나 저녁에.
신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꽃과 나무와 새들, 산과 바다와 호수를 창조했는지 감탄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 앞에서 우두커니가 되었다.
창조주가 본인을 닮은 모습으로 빚었다는 인간. 자연과 사물을 보면서 수없이 감동했지만 '왜 스스로에게는 감탄하지 않았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후하고 본인에게는 박한 편이었다. 남의 고민은 내 일처럼 공감하며 진심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막상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는 스스로를 다독이지 않았고, 친절하게 대하지 못했다. 대단한 완벽주의자도 못 되면서 언제나 높은 기준을 달성할 것을 종용했고, 성취를 했을 때에도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지. 다들 이 정도는 하고 살지 않아?' 하며 칭찬을 아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평범하고 순조로운 삶이었다.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달성해 가며 십 대와 이십 대를 보냈다. 스물한 살에 유방암 판정을 받긴 했지만 무사히 표준 치료를 마치고 학교로 복귀했고 졸업도 취업도 연애도, 회사 생활도 문제없었다. 괜찮은 인생,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자존감이 엄청나게 높은 쪽은 아니었어도 어디 가서 자신감 없이 쭈뼛대는 쪽도 못됐다.
또각또각 높은 하이힐에 딱 맞는 정장, 회사 이름이 적힌 네임택을 달고 한 손엔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핸드백을 들고 출근하는 모습이 나의 청춘이었다. 광화문, 여의도를 누비는 차도녀를 꿈꾸며 취업을 준비했으니 어떤 모습을 동경했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비록 내 직장은 시내가 아닌 관악산 둔덕을 올라야 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 건 지난 십 년의 일들 때문이었다.
아홉수가 무섭다더니 스물아홉에 유방암이 재발했다. 8년 만이었다. 암은 5년이면 완치라던데 그 후로도 몇 번의 재발을 더 겪으며 나는 더 이상 그 말을 믿지 않는다. 2차 암인 폐암을 겪고는 직장을 그만두고 속초로 내려갔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나를 수식하던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소속감이 없다는 게 왠지 어색했고, 최전선에 있던 방패막이 허물어진 기분이었다.
전업 치병생활을 하며 어린 시절 꿈이었던 '선생님'이 되기 위해 온라인 대학에 편입했다. 학부 전공이 달랐기 때문에 교육대학원에 진학하려면 선행 전공 점수가 필요했다. 인터넷으로 수업을 듣고 시험만 오프라인으로 보는 사이버 대학의 수업 방식이 그 당시 나에게 알맞은 형태라는 걸 알면서도 항상 뭔가 미진한 마음이었다. 서른이 넘어 회사를 그만뒀는데 대학원생도 아닌 대학원 '준비생'이라는 게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SNS기자단에 지원했을 때도 그랬다. 요즘은 각종 서포터즈들이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는 젊은이들과 인플루언서들이 유입되면서 경쟁이 세지고 스펙도 된다고 한다. 내가 활동하던 초창기만 해도 은퇴 후 인생 2막을 시작하시는 어르신분들이 대부분이었다. 함께 활동하는 분들과 유익한 이야기도 나누고 열심히 사시는 모습에 자극도 받았지만, 나는 여전히 못다한 회사 생활에 미련이 철철이었다.
아이 낳고 직장 생활하는 친구들이 보는 소셜미디어에 '양미리축제, 도루묵축제'를 홍보하며 잠시 민망해졌던 것도 사실이다.
아픈 건 죄가 아닌데 나는 자꾸 쭈구리가 되었다. 인생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자 조금씩 자격지심이 생겼다. 핑계와 이유는 얼마든지 많았다.
시민대학 강의를 들었을 때 강사님과 나눈 대화도 그랬다.
"혹시 OOO 교수님 아세요? 저희 동아리 선배 아버지신데."
"어! OOO 교수님이요? 알죠. 아들이 OO대 갔는데. OO대 나오셨어요? 근데 왜 여기 계세요?"
"아. 회사 생활하다가 아버지 은퇴하면서 이쪽으로 내려왔어요. 서울에서 멀지도 않고..."
"여기가 서울 근교는 아니잖아요."
"..."
늘 그랬다. 서울에서 대학 나온 젊은이가 왜 평일 이 시간에 여기서 이걸 하는지 나는 자주 설명해야 했다.
맨발 걷기 열풍이 불기 전, 건강 관리를 위해 황톳길을 걸을 때면
"여기 다 환자지. 다 아프니까 이러고 걷지 젊은 사람들이 여길 왜 와."
등 뒤에서 말하는 할머니 목소리가 가시처럼 와서 박혔다. 차라리 나이라도 더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늘 갖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건강도, 나이도, 직장도.
기억력이 좋은 건 때로는 독이 되는 것 같다. 고마웠던 일, 행복한 추억도 가득하지만 때론 속상하고 상처받은 일들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럴 때면 나는 글을 썼다. 일기, 편지, 브런치 등 나만의 공간에 다 털어놓고 나면 이제 진짜 놓아버릴 수 있을 것처럼 후련해졌다.
다 지나간 일 미련과 후회를 남겨서 무엇하겠는가.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고 그 모습도 나였다.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더도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하고, 스스로에게 친절했으면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라고 위안해 본다.
찰스 스펄전 목사의 글처럼 작년 피정에서 만난 신부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자존감이 낮아서 고민이라고 하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우리는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로 태초에 완벽하고 조화롭게 세상에 나왔으니 자신감을 가지라는 거였다.
강산이 바뀐다는 그 세월 동안 어떤 날은 뾰족한 마음으로, 어떤 날은 그런 마음도 다 보듬는 넉넉한 품으로 잘 버텨준 나에게 말하고 싶다.
"잘했어 이나야. 정말 고맙고 애썼어.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