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삶

봄, 초밥, 벚꽃 말고

by 윤이나

어제 당일치기 도쿄 여행을 다녀왔다. 신주쿠 쿄엔에 벚꽃이 만개했다고 하길래 초밥도 먹을 겸, 요즘 핫한 말차 디저트도 본고장에 가서 먹으면 더 좋겠다 싶어 남편과 훌쩍 다녀왔다. 라고 쓰고 싶었으나 도쿄 벚꽃 기행에는 웃지 못할 비밀이 숨어있었다.




사실 이 날은 일본으로 암 면역치료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작년 가을 검진에서 심장과 늑막에 약간의 삼출이 보인다는 소견을 듣고 정신이 혼미해졌던 우리였다. 남편은 매일 밤 잠들기 전 나의 갈비뼈에 손을 얹고

"하느님, 우리 이나모찌 모든 세포에 질서와 조화가 깃들어 무무와 건강하고 행복하게 백년해로하게 해 주세요. 이를 하느님께서 직접 챙겨주십니다."

남편은 어디서 들었는지 자꾸 하느님께 직접 챙김의 압박을 넣고 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인생이지만 이렇게라도 오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게 또 사람의 마음인지라 나도 본능처럼 희망을 찾고 다행을 바랐다.


의료 통역사와 연락하며 일정을 조율하고 서류를 보냈다. 이른 나이에 암을 만났을 당시 보험이 없었던 나는 일반적으로 환우들이 많이 하는 면역 치료나 요양병원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벼르고 별러 생애 딱 한 번 이런 치료를 해볼 수 있다면 지금이 최적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기서 청주 공항도 가까웠고, 재테크는 모처럼 상승장에, 남편도 올해부터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삼박자가 딱딱 맞았다.

출국 이틀 전 항공사에서 온 문자를 보기 전까지 나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항공기 비운항 안내

사유: 기재 운영 효율성 및 운항 안전성 확보를 위한 사업계획 변경
갑작스러운 비운항으로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불안한 세계정세와 유가상승 내 삶에도 영향을 주었다. 3월 말 첫 채혈 후 2주에 한 번씩 6회 방문하는 일정이었는데 다음 달 항공편이 취소된 것이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6월 도쿄행도 비운항이었다. 당장은 어떻게든 간다고 해도 앞으로 어떤 변수가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일정대로 출국해서 치료비를 일시납 하면 2주에 한 번은 필히 방문해야 하는데 갑자기 닥친 진퇴양난의 상황에 나는 울상이 되었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서 치료를 가는 것은 무리였다. 남편과 상의 후 통역사에게 사정을 알렸고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병원 예약은 모두 취소했다. 결정을 하기까지 혼란스러웠지만 막상 어느 한쪽으로 결론 내리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비운항으로 인한 티켓은 전액 환불, 4월 초 항공권은 수수료를 물고 취소했다. 문제는 이틀 뒤 비행기표였다. 출국이 코 앞이라 수수료가 절반이 훌쩍 넘었다. 남편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당일치기 도쿄행을 제안했다.




새벽 네시. 살면서 한 번도 일어나본 적 없는 시간에 알람을 맞추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다. 일정을 짜면서 우리가 원하는 식당을 가려면 관광지를 포기해야 하고, 벚꽃 만개한 신주쿠 공원을 가려면 웨이팅 필수인 맛집을 놓아야만 했다. 아시아에서 순위가 제일 높다는 나폴리 피자집도, 도쿄식 카이센동도 마음 같아선 전부 한 곳에 모아놓고 싶었다.


청주에서 가는 도쿄 노선은 나리타 공항뿐이라 비행기에서 내려 시내 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순순하게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네 시간뿐이었다. 이 사이에 점심, 저녁을 먹고 벚꽃 명소에도 다녀올 수 있을까? 계획을 짜면 짤 수록 의욕이 사라졌다.

"여보. 이 일정이면 거의 뛰어다니면서 벚꽃 봐야 할 것 같은데, 나 그냥 수수료 물고 안 가도 돼."

나는 남편을 회유했다. 기대했던 치료가 무산돼 잔뜩 풀이 죽은 나였다. 도쿄에 간다 해도 뭐가 눈에 들어올 것 같지도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던 무무는 그래도 벚꽃 시기에 맞춰서 일본 가는 것도 쉽지 않으니 다녀오자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사실 일본 벚꽃 여행은 남편의 로망이기도 했다. 우리는 원래 가고 싶었던 맛집을 대신 신주쿠 공원 근처에서 식사 후 벚꽃을 만끽하기로 했다. 배낭에 돗자리도 넣고 여행 갈 때마다 챙겨가는 모찌 무무 인형도 챙겼다. 네 시간을 겨우 자고 새벽 공기를 가르며 도쿄로 향했다.

원래 일정이라면 오늘 채혈을 하러 일본에 갔어야 하는데, 나는 병원이 있다는 역을 지나쳐 신주쿠 공원으로 가고 있었다.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고 하던데 정확히 내 얘기가 될 줄이야. 상황은 가끔씩 손바닥 뒤집 듯 쉽게도 변했다.


비행기 창문으로 눈 쌓인 후지산이 보였다. 절경이었지만 그냥 졸렸다. 입을 벌리고 자는 게 느껴져 다물고 싶었는데 그럴 힘도 없었다. 정신줄을 놓고 내내 잤다. 지체할 틈 없이 도쿄 시내로 이동해 공원 근처 평점이 좋은 초밥집에서 식사를 했다. 맛있었지만 막 그렇게 소름 끼칠 정도는 아니었다. 이것만 먹으려고 도쿄에 올 수 있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래도 디저트로 먹은 말차 파르페와 안미츠가 침체된 기운을 한껏 끌어올려 주었다.

이동하는 길 쇼핑도 소홀히 할 수 없어 예쁜 엽서도 사고 남편의 배낭도 득템 했다. 야무지게 택스 리펀까지 받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입장 시간이 되어 꼬불꼬불 줄을 서서 공원으로 들어갔다. 신주쿠 공원은 <언어의 정원>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배경지였다. 남녀 주인공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실사와 같은 생생한 화면에 도쿄타워도, 유명 맛집 두 곳도 모두 포기하고 선택한 유일한 장소였다.

분명 '2026년 실시간 도쿄 벚꽃 개화 상황', '도쿄 벚꽃 명소 TOP 3'와 같은 정보를 수시로 찾아보고 갔는데, '신주쿠 쿄엔 압승'이라는 블로그의 말과는 살짝 거리가 있긴 했다. 요 며칠 도쿄에 봄비가 내려 꽃이 많이 날아간 느낌이랄까. 벚꽃이 피긴 피었는데 다소 성성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예쁘긴 예뻤다. 벚꽃의 종류도 색깔도 다양했고 일본식 정원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었다. 다행히 꽃망울이 많이 달린 나무들도 있어 달큰한 벚꽃 향기를 맡으며 공원을 구경했다. 공원 잔디밭에는 나들이 나온 상춘객들로 가득했다. 한국의 은박 돗자리 위용을 알리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예상 못했던 일도 아니어서 어젯밤 남편과 돗자리를 목에 걸고 달리는 연습을 했던 게 도움이 되었다.


"여보, 좀 빨리 걸어야 될 것 같아요. 여보 여기서부터는 좀 빨리 걷자."

굼뜬 말을 토닥이듯이 나는 양반걸음으로 걷는 무무를 격려했다. 만 오천보 정도 걸었을 때 양쪽 새끼발가락이 아파왔다. 물집이 난 게 틀림없었지만 지체할 새가 없었다. 저녁이라도 먹고 비행기를 타려면 돗자리를 펼 시간 따위는 사치였다.

공원을 적당히 돌고 벚꽃을 배경으로 모찌 무무 인형 기념사진도 찍었다. 일정에는 없던 쇼핑도 했으니 이만하면 다 이뤘지 싶었지만, 돌아볼 때마다 그림 같았던 신주쿠 어드메의 타워 이름은 아직도 모른다. 횡단보도를 기다리며 구글맵으로 찾아보다가 포기했다. 시간 맞춰 공항으로 가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사진마다 너무 예쁜데 무슨 타워일까. 언젠가 알게 되겠지.


생애 첫 도쿄 여행은 이렇게 네 시간 만에 마무리되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남편에게 오늘 하루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묻자, 무무는 연신

"다 좋았어. 그냥 이 일정을 다 마쳤다는 거?"

이라고 말했다. 몇 개 안 되는 계획들을 무사히 마쳐서 좋았다는 대답에 나 역시 격하게 공감했다. 이동 거리가 워낙 길었고 초행길에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둘이 손 꼭 붙잡고 배낭 하나씩 둘러메고 초밥, 말차, 쇼핑, 벚꽃 구경의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방금 전까지 도쿄에 있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전쟁도 치료도 내 상황도 명확한 아무것도 없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출발한 당일치기 도쿄 여행은 영원히 못 잊을 추억으로 남았다.

초밥 먹으러 도쿄 가는 사람? 나였다. 벚꽃 보고 싶어서 당일로 일본 다녀올 수 있는 용자도 나였다. 시작하자마자 끝나버린 '부자의 삶'에 남편과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부자라면 이렇게 여행하고 특급 호텔에 들어가 꿀잠을 잘 같은데, 나는 행여 비행기 놓칠세라 셀카봉 꺼낼 시간도 없이 종종걸음으로 여행을 마쳤다. 묘하게 진 것 같은 이 기분. 아마도 느낌 탓이겠지.

이전 14화아줌마는 괜찮은데 애기 엄마는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