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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유니온 Oct 27. 2021

평등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시대의 아우성

2021 한국노동사회포럼 - 2022년 대선과 노동사회정책전망

* 2021 한국노동사회포럼 <2022년 대선과 노동사회정책전망>의 [주제2 - 디지털 전환시대, MZ세대와 청년노동]에서 발표된 김영민 사무처장의 글입니다. (2021.10.21.)


청년노동, 불안정 노동의 다른 이름

신문 사회면에 청년실업이라는 단어는 IMF 외환위기 때 처음 등장한다. 공식적인 청년실업률 집계도 1999년부터 시작된다. 그로부터 약 사반세기, 안타깝게도 이제 청년은 불안정 노동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자리매김했다. “청년실업자의 좌절, 졸업장이 실업증명서로”, “25세 미만 청년실업 급증”, “청년실업 특별대책 세워야”. 1999년 외환위기 직후에 신문 기사 제목이지만, 지금의 현실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그러는 동안 한국의 1인당 GDP는 1만 달러 수준에서 3만 달러로,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반열에 진입했다. 외형적인 국가 경제 규모, 소득수준은 모두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는데, 청년의 현실은 무엇이 다른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새로 취업하는 청년 세대의 일자리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현상은 여타의 선진국에서도 벌어지고 있지만, 초고속 경제성장을 해 온 세계 최고수준의 경쟁사회, 노동과 노동권에 대한 인식 부재, 수도권 집중과 극심한 자산격차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조건들은 이러한 청년 문제를 더욱 격화시킨다. 청년 체감실업률 27.2%, 청년층 첫 일자리 1년 이하 계약직 29%, 월급 150만원 미만 36%, 청년아르바이트 최저임금 위반율 27.8%. 여전히 변하지 않은 청년 노동의 2021년의 모습이다.


청년노동이 불안정 노동의 다른 이름이 된 것은 신규 진입자로서의 특성, 저숙련 노동의 확산이라는 흐름, 노동시장 이중구조로부터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이 이전과는 달리 처음 취업시장에서 진입하면서 노동시장에 쉽사리 안착하지 못하고, 불안정 노동을 반복하도록 한다.


본격화되는 저성장은 경제의 새로운 부분의 등장을 어렵게 한다. 디지털화와 4차 산업혁명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이로 인해 혁명적인 생산성 향상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은 찾아보기 어렵다. 근래에 새로 등장하거나 고속으로 성장하는 기업들이 완전히 새로운 영역의 시장을 창조했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던 시장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하고, 이를 독점하는 방식에 가까운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저성장은 새로운 종류의 산업이나 일자리가 덜 생겨나게 되고, 새롭게 진입하는 청년 세대에게 이로 인한 불이익은 집중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기 때문에 새로운 세대에게 보다 유리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새로운 기술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기업 자체에게 일자리의 양 자체를 늘리게 만들 수는 없다.


2000년대부터 진행된 세계화는 단순히 무역의 자유화만이 아니라 공급망의 분업화가 진행되었고, 중간 숙련 일자리가 사라지고 일자리의 양극화를 가져왔다. 이는 청년층이 갈 만한 ‘괜찮은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대표적으로 고졸 청년이 들어갈 수 있는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가 감소하였고, 대졸 사무직도 감소하였다. 반면에 판매직과 서비스직, 단순노무직은 증가하였다. 이러한 추세는 소수의 고숙련 고임금 일자리와 다수의 저숙련 저임금 일자리로 양분되는 노동시장의 변화를 청년층이 직격탄을 맞고 있음을 의미한다. 초단시간 일자리가 집중 분포하는 하위 10~20%를 제외하고는 임금 수준 자체는 불평등 감소가 나타나지만, 직종 구성 변화로 미루어 볼 수 있는 전반적 근로조건과 직업의 미래전망까지 감안해보면, 일자리 양극화 양상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여전하다. 문재인 정부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추진으로 공공부문은 일정정도 성과를 냈으나, 민간부문에서는 지지부진했다. 무늬만 프리랜서인 계약 관행들은 곳곳에서 여전했다. 이제 취업준비를 시작하는 청년들에게는 청년내일채움공제와 같은 정책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격차를 직접적으로 완화하는 시도도 있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개혁에 비해서는 당사자들에게 즉각적인 효과를 느끼게 해주는 정책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기업 생태계에서도 규모에 따라 생산성 격차가 아득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정책만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를 완화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매년 역대급 성과를 올리고 그 때마다 성과급 수준에 이목이 쏠리는 삼성전자만 보더라도, ‘저기는 아예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시장에 엄연히 존재하는 두 개의 나라나 다름없다.


괜찮은 일자리를 쉽사리 구하지 못한 청년들이 많이 선택하게 되는 것이 공무원 시험이다. 특히 일반직 공무원 시험 준비는 장기화되면 다른 취업 경로에도 불리하게 작용하게 되어 실업이 장기화되고, 사회로부터 배제되게 된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최근의 상황은 어떨까. 언론, 공기업, 공무원, 고시 및 전문직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15~29세)은 코로나19 여파 속에서 47만 명(2021년 5월)까지 늘어났다. 특히 코로나19 고용위기의 직격탄을 맞았을 여성 청년의 증가가 두드러진다. 1년 사이에 33% 증가한 24만 명으로 그 규모가 남성 청년을 추월하였다.


한편 청년 아르바이트 일자리의 상황도 녹록치는 않다. 2017~2018년에 대폭 올린 최저임금이 아르바이트 일자리의 질적 개선은 가져왔으나, 그 후 최저임금 인상은 과도하게 정체되었다. 또한 최근 초단시간 노동의 급격한 확산은 주휴수당을 지급받을 수 없는 청년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절반 내외에 이른다. 전통적인 고용 방식이 앱을 이용하는 플랫폼 노동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아예 최저임금의 적용을 피해가기도 한다.


사회초년생을 일회용품 쓰듯이 하는 노골적인 방식의 고용계약은 줄어들었지만, 제도의 빈틈을 이용하거나 직장 내의 위계를 활용한 폭력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면서 고용의 안정성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고용정책이 전환되었지만, 기업에서는 이러한 방식에 대응하여 수습기간을 1년으로 둔다거나, 자르고 싶어지면 직장 내 괴롭힘을 가해서 제 발로 나가게 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소는 도대체 누가 키우나

청년 세대가 전반적으로 겪고 있는 이러한 노동의 문제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개인의 노동권에 대한 침해인 것은 물론이고,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 이는 비용절감이라는 단어로 요약되는 2000년대부터 지속된 흐름의 결과이다. 조직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할 동료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일회용품으로 다루는 것이다. 신입 직원은 일단은 비정규직으로 뽑거나, 프리랜서라고 딱지 붙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외주화하는 방식이 오랜 관행이 되었다. 신입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비용절감이 가능한 직군이라고 여겨지면 그 직군이 통째로 그런 기형적 고용구조가 유지된다. 그러다보니 신입 직원을 뽑아서 가르친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상수가 된 청년 실업 속에서 적당한 수준의 임금으로 언제든 손쉽게 신입을 뽑을 수 있다는 생각이 표준이 된 것이다. 제빵기사, 방송작가 등 누가보아도 해당 산업에서 핵심 인력에 가까운 직군들조차도 아웃소싱과 비정규직이 이제는 당연하고 일반적인 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이 당연히 지속가능할 리가 없다. 청년들이 마르지 않는 샘일 리도 없고, 그렇게 진입한 인력이 계속 그런 삶을 견디면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필연적으로 인력의 이탈을 부르고, 그렇게 빈자리에는 다시 새로운 신입을 불안정한 고용으로 갈아 끼우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보면 산업의 인력구조 자체가 기형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고, 신입 때 쌓은 능력을 만개하기 시작하는 중간급 인력이 항상 부족한 상황이 도래한다. 기업은 직원을 키우지 않고, 직원은 기업을 신뢰하지 못한다. IT 분야의 인력 부족과 같은 현상도 신입 채용을 줄이고, 해당 산업 인력 양성을 소홀히 해 온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개별 기업 차원에서는 ‘합리적 선택’의 결과이지만, 전체 산업 생태계에서는 근시안적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첨단 산업과 역사가 깊은 산업이든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특성화고나 전문대 차원에서 현장실습을 갈 수 있는 기업체를 찾지 못하는 풍경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장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현장실습을 나가는 학생들은 그냥 짐일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냥 직원처럼 일을 시킬 수 있는 것을 더 선호한다. 기업은 늘 자신들이 즉각 투입할 수 있는 인재를 요구하지만, 그 인재를 만드는 것은 개별 기업이나 산업계의 몫이 아니라, 학교와 사회의 몫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청년들은 석유 한 방울도 나지 않는 한국에서는 ‘사람이 유일한 자원’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커왔다. 심지어 2000년대에는 지금의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라고 이름을 바꿨을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사람이 과일도 아닌데 ‘갈아 넣는다’는 표현이 아주 익숙하다. 세상에는 공짜는 없는 법이고, 오래도록 지속된 한국 사회의 이러한 흐름들에 청년들은 전쟁 이외에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수준의 저출산으로 답변하고 있다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더 서글픈 것은 기업만 탓할 수 있는 문제만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연공성이 높은 임금체계나 정년연장 등의 이슈에서 조합원의 견해를 민주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업계에 진입하는 이들이 ‘갈려나가는’ 모습은 노동조합에서 좀처럼 대변되지 않았다. 이제는 여러 헌신적인 노동운동가들의 노력으로 이러한 고민을 현장의 조합원들과 치열하게 논쟁이 벌어지지만, 심리적으로 성 안팎의 경계가 뚜렷해진 상황 속에서 연대의식을 만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중심부 노동시장의 고령화로 커지는 세대 차이는 심리적 거리를 늘리고, 중심부에 진입하는 과정의 경쟁은 강력한 보상심리가 또 하나의 벽으로 작동한다. 이제는 중심부에 진입하기 위한 경쟁의 양상 자체가 계층 대물림의 과정으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들은 겉보기에 모두가 치열한 경쟁을 경험했기 때문에 은폐된다. 경쟁과정에서 얻은 트라우마는 주변부에 있는 이들의 존재를 중심부에 진입한 나 자신과 분명하게 구별시킨다.     


노동시장이 서바이벌 오디션은 아닐텐데

괜찮은 일자리가 대단히 협소하거나 규칙이 없는 업계의 경우에는 더욱 야만적이다. 이런 경우에는 방송에서 볼 수 있는 서바이벌 오디션이 사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수없이 벌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아이돌로 데뷔하기 위해서는 길고 긴 연습생 생활을 견뎌야 하고, 그러한 여정을 겪고 데뷔한다고 하여도, 아무런 성공도 거두지 못하고 사라지고는 한다. 노동시장의 모습이 마치 그와 다르지 않다.


최근 문화컨텐츠 산업의 선두에 서있는 웹툰을 예로 들어보자. 웹툰 작가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사실상 무료 연재를 하다가 플랫폼의 선택을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을 위해서는 그림을 잘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독자와 소통하고 독자의 요구에 반응하거나, 혹은 그러한 요구와 압력을 홀로 견뎌야만 한다. 휴일 없이 꾸준히 연재하다가 직업병을 갖게 되는 것은 덤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정식 작가로 데뷔하게 되더라도 극단적인 격차를 경험하게 된다. 업계 최고가 되면 높은 매출을 올리게 되지만, 성공을 거둔 극소수의 작가를 제외하고는 극심한 생활고를 견뎌야 한다.


‘슈퍼스타 스타일리스트’가 존재하는 패션 스타일리스트 업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스타일리스트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타일리스트 개인의 어시스턴트로 고용되어 그야말로 열정페이 상태를 버텨야만 한다. 아티스트의 촬영 일정에 따라서, 또는 팀의 업무 배치에 따라서 언제든지 일해야 하는 24시간 대기조로 일하는 것은 기본이다. 제대로 정해진 휴일은 당연히 없고, 평균 월급이 90만원, 100만원에 불과하다. 일하면서 발생하는 교통비, 퀵비, 수선비 등에 대한 비용처리도 제대로 안 되는 경우도 많고, 그나마 새벽에 출퇴근하면 택시비라도 주면 다행이라고 여겨야 한다. 협찬 받은 옷이나 액세서리가 파손이나 분실되면 자신의 책임이 아니어도 변상을 요구받고, 월급보다도 비싼 돈을 물어주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패션에 대한 열정과 스타일리스트가 되겠다는 꿈으로 버텨보지만, 생계도 벅찬 조건은 1년을 버티기도 쉽지 않다. 전형적인 열정페이와 희망고문 속에서 이를 견뎌내고 성공을 꿈꾸지만, 그러한 성공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거두는 구조이다.


화려해보이지 않는 직업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미용사가 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우선 미용실에서 스태프로 일하면서 최저임금도 안 되는 임금을 받고 몇 년을 버텨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헤어디자이너로 일하게 되더라도 4대 보험 가입은커녕 최저임금 수준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업계 표준으로 정착된 성과급 방식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손님을 상대했는지에 따라서 임금 수준이 달라진다. 출퇴근은 정해져 있음에도 마치 개인사업자로 취급한다. 청담동 미용사 월급이 600만원에 육박한다고 인터넷 상에 화제가 되기도 하지만, 화려해 보이는 업계 최고 수준의 처우와는 별개로, 미용업계의 대다수는 열정페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이 노동으로 대우 받고, 일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법에 따라서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마치 스타를 뽑는 오디션에 임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감내하면서 노력해야 하고, 그러한 노력은 온전히 내 자발적 선택인 것처럼 ‘그러면 다른 일을 했어야지’라는 핀잔으로 돌아온다. 극소수의 화려한 성공은 조명하지만, 대다수의 실상은 묵인된다.


최근 논란이 되었던 국민의힘 곽상도 의원의 아들 곽 씨는 50억 원에 달하는 퇴직금을 소명하는 과정에서, 자신은 화천대유라는 회사에서 진행하는 사업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베팅’한 것이라고 말했다. 취업을 베팅이라고 말하는 것도 의아하지만, 어쩌면 한국 사회가 노동을 다루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누가 더 현명한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누가 더 노력했느냐에 따라서 다른 대우를 받는 것이 정당하고, 한국식 노동윤리인 것이다. 노동이 노동답게 대우받고, 땀 흘려 일한 대가가 대접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윤리는 외면 받고 있다.     


공정담론이라는 당연한 귀결

이러한 청년노동의 현실과 지난 5년간의 사회경제적 개혁의 실패가 가져온 당연한 귀결이 지금의 공정담론이다.


청년이 겪는 한국의 노동시장은 두 가지이다. 먼저 시험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인증된 예외적인 소수만이 중심부로 진입이 허용된다. 이 경우에는 지금까지 물려받은 각자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서 불평등한 경쟁을 극한의 수준으로 겪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경쟁에 뛰어들어 결국 승리했다고 하여도, 개인이 겪은 경쟁 자체는 매우 고강도였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러한 시험이라는 체계조차 없는 경우에는 무법지대의 적자생존 서바이벌 경쟁을 치러야 한다. 여기에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장기간에 걸친 열정페이와 희망고문은 기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견뎌낸다고 하여도 운이 따라야만 성공할 수 있고, 설령 성공한다고 하여도 언제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불안을 늘 품고 살아야 한다.


2016년 겨울, 청년들이 들었던 촛불은 이러한 노동의 모습을 바꾸자는 강력한 열망을 연료로 불타올랐다. 특히 보수 정부 하에서 청년들이 노동을 경험하면서 겪는 고통은 마땅히 그래야하는 것으로, 혹은 일종의 성장통으로 치부되어 왔고, 정치의 훈계와 정책의 외면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청년들이 경험한 것은 문재인정부의 사회경제적 개혁의 후퇴, 그리고 노동운동의 대안 부재 또는 실력 부족이었다. 5년이 지나고 난 후, 현실을 변화시킬 좌표를 잃었다. 그렇기 때문에 껍데기뿐인 공정이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 담론으로 남은 것이다.     


코로나19 속 청년 노동

여기에 갑작스럽게 덮쳐 왔던 코로나19는 2년 가까이 청년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 특히 생계에 필요한 소득을 얻기 위해서 일자리가 쪼개지고, 고용이 유지되는 곳의 노동강도는 올라갔고, 비대면 교육이 채울 수 없는 공백과 투자 열풍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킨다. 전국 각지의 청년유니온 활동가들이 이야기에서도 코로나19 이후의 이러한 악화는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투잡 하는 분들 굉장히 늘어서, 직업 두 개를 갖는 단시간 근로 증가한 것 같다. 남자 분들은 보다 높은 수익이 나오는 야간에 배달을 하고, 쿠팡이츠처럼 이런 것들이 많아져서. 하는 분들이 정말 많이 늘었다. 동네에만 배달 노동자 관리하는 지역 업체가 2개 더 생겼다. 창업을 하는 청년들도 운영 안 되니깐 자기가 배달 일을 하는 경우도 생겼다.
패스트푸드 배달이 너무 많아져서 노동강도가 높아졌다. 옆에 마트 휴무하면 마트에 있는 롯데리아가 닫으니 노동강도가 대단히 높아진다. 일하는 아르바이트가 총 15명인데 전부 초단시간으로 일하고, 솔직히 더 한 두 명 있으면 좋겠는데 또 장사 안 될때는 더럽게 안 되고 한다. 10시 이후에는 손님이 없고, 요즘 점심 때도 배달 다 시키고 하는데, 쿠팡 배달 오신 분들도 매번 얼굴이 다른 분들이 온다. 부산도 서비스업이 대다수여서 초단시간이거나 5인 미만이어서 고용안전망에 대한 이런 게 예전부터 취약하다. 투잡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컴포즈 커피와 이디야 커피에서 동시에 일 하다가 하나 장사 안 되서 나가면 수입 절반으로 줄어들고 한다.
공단에 일감이 엄청 줄었다. 출근 띄엄띄엄하다가 지금은 그래도 없지는 않은데 공장 쪽은 연장근무로 소득을 많이 받는데 그런 면에서는 최저임금 근접해서 소득이 줄어든 부분이 있긴 하다. 실제 소득이 줄어든 부분이 있는데, 아르바이트 하는 대학생들 대부분이 초단시간으로 일하는 분들이었다. 투잡으로 하는 분들이 늘어났다.
대학이 계속 온라인으로 진행되는데 수업 집중이 안 되니 의미를 모르겠다는 분들이 많고, 그러다보니 반 이상은 스터디카페에서 고시나 이런 공부를 많이 한다. 절반은 아르바이트하면서 주식, 코인에 투자하고, 그걸로 대출받고 돈을 잃은 분들이 있다. 조바심이 있다 보니 취업자체는 안정적인 기반을 해서 고시 쪽으로 준비하는 거 같고 그 외에는 단기로 아르바이트해서 투잡 쓰리잡을 하거나 주식이나 코인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지난 5년을 돌아볼 때, 단순히 정부의 책임을 규정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가령 소득주도성장이 대표적인 경제 개혁 정책으로 여겨졌을 때, 여기에 대한 노동운동의 입장은 무엇이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단순히 정부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개혁을 위해서 그릴 수 있는 그림이 거기까지가 최대치였다는 것이고, 지금의 한국 사회가 가진 역량이 거기까지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정부를 규탄하고 책임을 묻고 요구하는 방식의 정치만으로는 부족하다. 보다 적극적인 이해 조정과 정치적 논쟁, 평가가 절실해진다. 이와 관련된 논의를 위한 세 가지 질문을 꼽아본다.


먼저 개혁의 청사진에 대한 책임이다. 최저임금 1만원을 둘러싼 논쟁이나 국민연금 개혁 논쟁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 1만원은 단순히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결정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혁조치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모두가 안다. 그렇다면 최저임금 대폭 인상이 차질을 빚거나 다른 개혁조치가 함께 수반되지 않는 조건에서는 어떤 정치적 판단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최저임금 1만원을 반복할 뿐이었다. 국민연금 개혁 논쟁도 유사하다. 기금의 급격한 고갈이 가져올 제도적 불안정성에 대해 사회적 우려는 회피한 채, 국가가 존재한다면 당연히 존재하는 지급의무를 법제화하자고 주장하여 논점을 흐렸다. 여전히 노동운동은 국가 운영에 주도적으로 개입하는 세력이기보다는 책임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주체에 불과했던 것이다. 임금체계, 정년 연장, 사회적 대화 등 무수한 주제에서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19 이후 심화될 양극화에 비슷한 방식을 유지한다면 상황을 타개하는 데에 큰 변수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다음은 날로 적나라해지는 투기 사회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최근 벌어지는 가상화폐 논란은 마치 청년 세대의 문제로만 치부되는 것은 기만이다. 한국의 자산 축적 방식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언제나 부동산이었고, 주식 투자는 어떤 이념과 계급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투기 열풍은 청년세대만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러한 투기 광풍이 남길 허탈함이다. 이 허탈함은 노동의 가치를 훼손하고, 사회를 좀먹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노동은 계속 쪼개지고 있다. 계약직으로 쪼개지고, 초단시간으로 쪼개지고, 플랫폼으로 쪼개지고, 노동자로서의 개인의 존엄도 끊임없이 쪼개진다. 투기 광풍 속에 삼켜지기 너무나도 쉬운 상황이다. 여기에 맞서 어떻게 잃어버린 일의 존엄과 노동의 자부심을 찾을지, 노동조합과 시민사회가 어떤 것을 할 수 있을지 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짜 공정, 진짜 공정경쟁이 어디에 필요한지의 문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 가장 필요한 것은 입시나 취업 경쟁이 아니라 기업들이 경쟁하는 시장이다. 아주 오랫동안 재벌이 이를 훼손해왔다면, 이제는 거대 독점 플랫폼 기업들의 등장이 이를 훼손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로 이러한 디지털화가 빨라지면서 플랫폼 기업에 대한 우려는 커지고 있다. 이러한 기업 생태계의 문제에 더욱 개입하고, 공정의 의미를 바로 잡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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