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독립시키는 게 최최최우선일걸 1
남편과 나는 아이들이 어릴 때 우리 가족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그 결과 우리가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넓은 평수의 비싼 집과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사회적 위치까지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바라는 성공은 아이들이 올바른 인성을 기본으로 자기의 능력을 갖춘 전문직을 갖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인격체로 독립을 시키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아이들과 우리 부부가 함께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은 누구네처럼 물려줄 재산이 있거나 전해주어야 할 가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아이들은 자기만의 능력을 가져야만 자립해서 살아갈 것이고 그래야만 자기들도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우리의 노후 자금도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절대 노후 자금을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노후 자금을 나누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작은 목표들을 생각했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가기 위한 길을 닦는다고 생각했다. 아주 긴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출발점은 책이었다.
올바른 인성을 지니고 관심 있는 것에 몰입할 수 있으며 꾸준하고 성실하게 임하는 자세의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책을 꾸준히 읽어주고 장난감보다는 책을 사주었다. 예쁜 옷을 사줄 돈을 아껴서 책 부자가 되게 해주고 싶었고 책을 통해 다양한 것을 만나게 하고 싶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외출복은 단벌이었지만 책은 아끼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침 그 당시(그때는 어린이 도서관이 없을 때였다) 우리 동네에 매달 회원비를 내면 그곳에서 얼마든지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전집 동화책을 하루에 5권씩 빌려주는 곳이 생겼다. 교대 근무를 하던 아빠가 아침에 퇴근하면 잠을 자야 하기에 우리는 그 좁은 집에서 떠들고 놀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와 나는 아침밥만 먹으면 그 책방으로 출근을 하고 점심까지 앉아서 책을 읽었다. 오는 길에 책 5권도 빌려고 내일 반납까지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선생님이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으면 했다. 그래서 태도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가 될 때마다 했다. 수업시간 선생님과 눈을 맞추라고 하고 세상에 사소한 것은 없으니 뭐든지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런 태도는 지금부터 길러야 한다고 했었다.
애들이 하교할 때 나는 항상 거실 넓은 책상에 앉아 있었고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외출을 했다가도 아이들 하교 시간 전에 들어와서 여태까지 쭉 했던 것 마냥 책상에 앉아 있었다.
자격증 공부든 외국어 공부든 아니면 로맨스 소설이라도 읽고 있었고 아이들보다 먼저 책상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도 우리는 책상에서 인사를 했다.
아이들 입에서 “엄마, 그만하고 자”소리가 나올 때까지 책상에 앉아 책을 들고 있었다.
(이때부터 나의 로맨스 앓이가 시작되었었다)
아빠가 얼큰하게 취해서 늦게 들어오던 날도 혼자 방에서 티브이를 보며 웃는 소리가 방문틈을 타고 들려도 나는 책상을 사수했다.
아이들은 나와 함께 책상에 앉아서 숙제하고 책도 보고 보드게임도 했다.
이때 남편은 나에게 ‘신사임당’이라는 닉네임을 만들어주었다.
아이들이 중고등으로 가면서 코로나도 겹치고 해서 집에서 아이들과 더 함께해야 했었다.
양손에 폰과 탭을 들고 있었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스마트폰도 없던 작은 아이는 6학년 이 시기에 폰의 세계에 합법적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입문하셨다. 이때부터 폰 금단 현상도 일어났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만........
이로 인해서 남편과 나는 외출할 일이 있으면 교대로 집을 지켰다. 그리고 아이들 돌아오기 전에 꼭 집에 같이 있으려고 달려오곤 했다. 지킨다고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눈치 좀 보라고 거실에 떡하니 지키고 앉아 있었다. 마음 많이 불편하라고....
중고등에 들어가니 우리의 예상보다 사교육비가 커졌으며 식비 또한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학원비가 고등은 중등의 곱절이 되었으며 먹는 양과 횟수 역시 배가 되었다.
우리 가정 경제에서 식비와 교육비가 대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마이너스가 생기기 시작했고
어른들께서는 이해를 하지 못하셨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먹이느라 쪼들리는 우리를, 시어머니는 탐탁지 않아 하셨다.
“지가(자기의 경상도 사투리) 먹을 건 다 들고 태어난다.
그렇게 안 해도 다 잘 크고 잘 먹고사는데 요즘 굶어서 죽는 사람이 어딨노.
뭘 그렇게 유별나게 공부를 시킨다고 애들 힘들게 하고,
그 월급으로 돈을 모았음 나 같으면 벌써 빌딩을 세웠겠구먼
뭐 한다고 애들 매번 밥 줘야 해서 뛰어 들어간다고 난리고
그래봐야 애들 버릇만 나빠진다. 아를 영~ 잘못 키우고 있구먼”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내 속마음: 어머님이 키우던 시절에는 취업하기가 어렵지도 지방 간의 격차도 심하지 않았고 비정규직도 심지어 스마트 폰도 없었잖아요.... 지금은 불행히도 세상이 안 그래요 ㅠㅠ 그냥 있음 우리가 계속 먹여 살려야 할지도 몰라요....
남편과 저는 따뜻하게 맞이해 주고 챙김을 너무 받고 싶었던 사람들이라서요 우리 애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봐야 평생에 몇 년이라고.)
친정 엄마 역시도 애들한테 다 투자하지 말라고.... 노후 자금으로 모아야지 왜 그렇게 모든 걸 아이들에게 퍼붓냐고... 분명 후회한다고 이해가 안 간다고 하셨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내 속마음: 사실 나는 엄마가 날 이렇게 시켜줬다면 하는 바람들로 아이를 키우고 있어. 혹시나 나도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경력단절이 와도 다시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하면서 말이야.
내 아이는 경력이 단절되어도 다시 자기의 일을 찾아서 당당하게 나갈 수 있기를 바라서 이러는 거야. 난 그게 아이와 나의 행복이라 믿어.
난 지금 아주 열심히 아이의 행복과 우리의 노후 대비를 실천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