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시대, 우리에게 '노인'은 어떤 의미인가? -상

<나이듦에 대하여> 컨퍼런스를 보고 온 후기

by 유니버셜

*글에 나온 모든 내용은 컨퍼런스에서 듣고 온 내용을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여 개인 문체로 옮겨 담았습니다.


2023년 4월 21일에 열린 <나이듦에 대하여> 컨퍼런스를 다녀왔다.


우연히 알게 된 이 컨퍼런스에 대해 알아보던 중 얼리버드로 16만 원이나 하는 티켓값에 놀랐지만, 개인적으로 관심이 큰 '저출산과 -고령화'문제를 사회인문학적으로 다룬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제하여 다녀오게 되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개인적으로는 큰 감동을 얻고 와서, 그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이렇게 글로 남기게 되었다.




누가 노인인가?

우리는 65세 이상의 사람을 보면서 '노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왜 '65'라는 숫자에 우리가 집착하게 되었을까?

약 1950년대에 UN이 '고령지표'산출을 위해 65세 이상의 인구를 '노인'으로 정의했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세계 평균 수명이 49세였고, 선진국이었던 미국이 약 68세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평균 수명 기록이 없지만 1970년에 통계로는 61세라고 한다.
이 말을 다시 말하면 처음 '고령인'을 정의하던 최초의 과거에 - UN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초고령의 인구'를 노인으로 봤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지표를 현재 절대적으로 믿으면서 해당 인구를 일상에서 배제하고 있다. 1980년대에 비교하면 약 40~50년 만에 우리의 기대수명이 17세 이상으로 늘어났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노인은 언제 자신을 노인으로 자각하는가?

강연에서 언급된 책 <내가 늙어버린 여름>

그 해 여름, 요가 수업을 받다가 늘 해오던 아사나 동작이
점점 어려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몸의 균형을 잡는 일이 하나의 도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갈 때면 거의 매달리다시피 난간을 꽉 붙잡아야 했고 지하철 안에서는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이 질문에 대해 한 연사님이 내민 책이자, 답변이다. 이 책에서 목소리는 내는 주인공은, 어느 날 늘 해왔던 요가 동작이 되지 않았음을 느끼고, 그때야 자신이 '나이듦'을 인지헀다.


이처럼 개인에게 '나이듦'에는 어떠한 숫자나 개념의 '정의'라는 것이 없다. 그저 개인마다 각자가 경험하는 어떠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주관적인 감정'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성별-계급-가족관계등에 따라 다른 의미상 속에서 체험되기 때문에 어쩌면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던 사람이 더 크게 그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 재벌집 막내아들의 회장님은 자신이 치매에 걸렸음을 인지했을 때 그 충격이 남들의 몇 배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 사회는 노년에게 꿈꿀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진 연사는 연세대학교의 정진웅 교수님이었다. 나는 강연에 들어가기 전, 이미 이 질문 자체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노년의 꿈꾸기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내 어린 시절(약 1950년대)만 해도 여학생들이 가질 수 있는 꿈은 간호사, 교사, 현모양처 정도였다. 사회가, 문화가 여학생들에 그 이상의 미래를 보여주고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는데, 어쩌면 그 여학생들이 그런 꿈에 만족하는 것도 당연한 거였을 것이다. 그렇다. 문화가 상상하지 못하는 꿈을 개인이 어떻게 꿀 수 있는가?


"문화가 상상하지 못하는 꿈을 개인이 어떻게 꿀 수 있는가?"

문화가 함께 꿔주지 못하는 꿈은 개인 스스로 꿀 수 없다.


노인 국회의원 / 노인 경찰 / 노인 지식인 / 노인 선생님 /노인 PD ….
'노인'이라는 단어에 그 멋진 직업을 가져다가 붙여도 어색하다. '노인'과 함께 붙은 단어를 생각해 보라고 하면 우리는 '독거노인' 그 이상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노인'을 '빈곤하고 불쌍한' 존재로 소구하고 있다. 이를 'Poverty porn'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미디어에 계속해서 그들의 안타까운 삶만 노출시킴으로써 사회 전반에 걸쳐 그들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행위이다.


누군가는 반문할 수 있다.

'그래도 요즘 얼마나 많은 노년의 삶이 미디어에 긍정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도 있어!'

여기에 대한 답으로 교수님은 강연에서 <꽃보다 할배>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하셨다.

꽃보다 할아버지에서 나온 장면

꽃보다 할배에서는 물론 과거의 다른 예능보다 '노년'의 모습을 열심히 조망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담아내려고 하는 '노년'의 모습에는 긍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로, 백일섭 배우가 프랑스 지하철 한복판에서 짐이 무겁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가져온 큰 장조림통을 발로 차서 던졌다. 그리고 이 장면은 여과 없이 방송되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만약 이런 행위를 '장원영'이 했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장원영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회의 공분을 일으킬 것이고, 온 포털에 그녀를 마녀사냥하는 글로 가득할 것이고, 아마 그녀는 연예인 활동을 그만둬야 할 것이다. 물론 그전에, 이 촬영분은 편집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꽃보다 할배>의 제작진은 여실히 드러냈다. 그리고 시청자들 그 누구도 백일섭 배우를 욕하고 마녀사냥하지 않았다.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노인'에 대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집적이고 아집적인 것이 당연하다'


'고집적이고 아집적인' 모습이 아니라면, 또 소비하는 방식은 있다. 순박하고 욕심 없고 아기 같은 모습이다. 노년이 가질 수 있는 '입체성'은 최소한 우리 미디어 안에서는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제한하고'있다.

물론, 성공한 시니어들의 모습이 점점 미디어에 노출되고 있다. 하지만 굉장히 소수이다. 그리고 그 소수들은, 노인이 절대 꿈을 꿀 수 없는 모습이다.

윤여정 배우의 지그재그 광고

윤여정 배우의 당당하고, 아름답고, 젊은 이들의 트렌드를 잘 이해하고 있는 이러한 모습. 하지만 이 모습이 정말 이를 지켜보는 '노년'에게 꿈이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건 아마 20-30대가 원하는 미래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노년의 청사진'은 정말 소수의 '성공한' 노년만이 꿈꿀 수 있는 미래가 아닐까?





우리 사회는, 다른 어떤 사회구성원보다 '노년'에 대한 꿈은 함께 꾸지 않고 있다.








젊은이들이 바라보는 나이듦


서울시 노인들에게 '몇 세부터 노인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2016년에는 71세, 2018년에는 72세, 최근 통계에는 평균 75세로 답했다고 한다. 이 답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만, 컨퍼런스의 연사였던 '송길영 데이터 분석가'는 새로운 질문을 내놓았다.


나이는 노인을 수치적으로 정의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노인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우선 사람들이 '노인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집, 새로움에 대한 저항'의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따라서 보면, '새로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태가 나타난 순간'을 노인이 되는 순간으로 봐야할까?

어떤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약 평균 31세를 지나게 되면서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지 않게 된다고 한다.

누군가는 과거의 네이버 웹툰 유아이가 편했다가 변화한 유아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럼 이런 경험을 한 모두를 '나이들었다', '노인'이 다 되었다. 라고 판단해야할까?



우리는 이미 삶의 전반에 걸쳐 각각의 '장르별'로 나이듦을 경험한다. 이는 모두가 겪는 경험이고, 이 경험은 모두에게나 고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나이든 사람(노인)’을 이야기하는 순간 나는 나를 그 집단에서 완전히 뺀다. 이미 ‘나이들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나는 아니다’라는 타자화를 한다.


왜, 우리는 '노인'에 대해서만큼은 이렇게도 살벌하게 '혐오'의 감정을 내보이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 사회의 아쉬운 시스템을 먼저 이야기 해야한다.





통계청 자료, 한국이 7년이라는 가장 빠른 속도를 보임

우리는 그 어느나라보다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에 도달하고 있다.

이 말이 담고 있는 뜻과 예상되는 미래는 정말 많지만, 우선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사회 시스템'이 아직 이를 못 따라가고 있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것이 '노인의 죽음'에 대한 의료 시스템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숱하게 많이 - 우리의 이상과는 다른 형태를 한 노인들의 죽음을 미디어에서 보게 된다.






이들이 현재 놓여져 있는 처지는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이미 잘 알고 있다.

'현실과 괴리가 큰 사회의 시스템', '돌봄의 미성숙함', '그들에게 없는 꿈꿀 권리'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는 이 모습을 '타자화'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강연을 들으면서 하게 되었다.


내 미래가 저런 모습이진 않을거야, 나랑은 다르잖아.



그리고 이 타자화를 지속하면서, 그들의 불행한 현재를 어쩌면 그들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것일 수 있다.

이상한 갑옷을 입으며 지하철을 돌아다니는 할아버지, 단소로 사람을 위협하는 아저씨, 빨간 모자와 태극기를 들고 다니는 할아버지들.



우리는 실제로 정말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노인들의 모습'을 봤고, 내 경험을 비춰 봤을 때, 그들을 혐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그들 모두를 '직접 보고, 경험했는가?' 솔직히 말하면 거의 대부분은 '내 기억'이 아니다-라고 연사가 말했다. 물론 살면서 정말 두-세번 노인과의 안좋은 경험을 쌓았을 수 있으나, 이 조금의 기억을우리는, SNS를 통해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쳐 아카이빙한 칩합체를 통해 '사실화'하고 '일반화'한다.


우리는 그들에 대한 ‘타자화’를 다같이 힘을 합쳐 일상화한다.


다시 한 번 우리를 돌아보자.


우리는 사실, '사회가 지켜주지 못할 나의 노년'이 두려운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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