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여자 멋있지?
2023년 벼락치기를 하면서 결심했던 것 중 하나. 포르투갈 여행에서 기록했던 일기를 다시 옮겨보기!
어디든 여행을 다녀와본 분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여행지에서 쓴 글이야말로 나의 모든 있는 감성 없는 감성을 그러모으기 마련인데, 그래서 이걸 그대로 옮긴다는 게 좀 쪽팔리긴 한데, 그래도 생색내본다. 2주 다녀왔지만 마치 몇 년은 지내다 온 것처럼.
* 퇴사 후 새 직장으로의 첫 출근을 앞두고 떠난 마드리드x포르투갈 여행 일기를 다시 옮겨씀
마드리드 코인빨래방(한국에서도 안 가봄)에서 기억을 더듬어가며 쓰는 중.
막간을 이용한
스페인에서 본 신기한 풍경 3가지
# 1.
오늘 드디어 날씨가 맑아져서 알게 된 것. 햇빛이 가득한 낮에는 아침 저녁과 다르게 무진장 따뜻하기 때문에 일교차가 엄청 크다. 만약 거리에서 롱코트나 패딩을 입은 사람을 봤다면? 고개를 살짝만 돌려보세요. 반팔이나 나시 차림의 사람들도 바로 함께 볼 수 있습니다.
#2.
번화가로 나가보니 구걸하는 사람도, 노숙인도 많다. 스페인은 최근에 경제위기도 겪고, 실업률도 높다고 하는데 그래서인가?
#3.
사람들이 진짜 멋쟁이다. 내 숙소가 있는 곳이 마드리드 시내에서도 혹시 손꼽히는 fancy한 구역?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패션 아이템, 색깔, 자기만의 멋… 다 하나하나 신경 쓴 느낌이 나고 또 엄청 잘 어울린다.
전날 프라도 미술관에서 처음 알게 된 호아킨 소로야.
전시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가였는데(*전날 일기),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우연히 창밖으로 ‘엇, 소로야?’ 하고 소로야 미술관을 발견했다.
정말 행운이었던 듯. 아직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을 가보진 않았지만 오히려 마드리드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프라도, 티센 미술관보다 더 좋았다. 전시작품 수는 훨씬 적지만, 소로야가 살고 그림을 살았던 집과 정원에서 관람객이 아니라 진짜 손님이 된 것처럼 따뜻한 그림들을 편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관람료도 3유로밖에 안 하는 것 실화?
사진을 여럿 찍어오긴 했지만 바닷물을 표현한 색감이나, 보기만 해도 뭔가 일렁일렁 너울대는 따스운 감정들… 그런 것들이 영 담기지 않는다.
그 다음 보러간 티센. 티센은 작품보다는 가는 길이 더 기억에 남는다.
아니…
어제 그렇게 양동이째로 비가 쏟아붓던 곳 맞나요?
춥지도 않고 화창 그 자체. 우산으로 시야도 가리지 않고, 허리도 꼿꼿이 펴고 다니니 새삼 풍경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거리가 너무 멋있었다. 후… 남은 여행 일정도 이런 날씨의 행운이 좀더 나와 함께해주면 좋을텐데. 하지만 친구왈 포르투는 날씨 변덕이 진짜 미친년이라고 하니(*그리고 정말 사실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늘 우산을 챙겨서 다니도록 하자.
티센은 무슨 서울시립미술관 같은 곳에 고갱, 마티스, 드가, 뭉크, 샤갈, 호퍼, 로스코, 자코메티, 호안 미로,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 잔뜩 전시돼 있어서 조금 어이가 없었다.;;
만약 지금 말한 작가들 중 딱 한 명만 집어서, 주요 작품은 다 빠진 채로, 한국에서 ‘누구누구 전’이 열리게 된다면 분명 미어터질 것인데. 심지어 여기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요렇게 3가지.
뭉크의 <일몰>(Evening)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 방>
자코메티의 <여성의 자화상>(Portrait of a Woman)
<일몰>은 분명 너무 평화로운데, 뒤편의 남자와 여자는 단란해보이는데, 정작 주인공 여자의 눈빛이 진짜 돌아버릴 정도로 공허하고 처연해서.
여자는 당시 같이 살던 뭉크의 여동생이고, 실제로도 우울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우울해봤던 사람들은 다 안다. 뭐라고 딱 표현하기엔 어려워도, 저 눈빛을 보면 그 때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지 다 안다. ‘어차피 다 끝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제 아무리 아름다움이라 할지라도 ‘의지’라는 걸 일으켜 세워주진 못하는.
<호텔 방>은 침대에 여자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쓸쓸할 일?
자세히 보니 호텔 방이긴 한데 TV도 창문도 없고. 구두는 아무데나 던져져 있고 겉옷이랑 모자도 널부러져 있다. 손에 무언가 종이를 들고 있는데, 또 정작 시선은 종이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듯하고.
여기에 앉아 있지만 누구보다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런데 또 벗어날 수는 없으니 일단 겨우 걸터앉아만 있는 느낌.
누구나 이런 순간이 있겠지. 내가 모를 뿐. 나도 그렇고.
(갑자기 감성이 돋는 바람에… 혼네의 ‘Warm on a Cold Night’ 들으면서 앞에서 멍 때리고 왔다.)
자코메티 <여인의 자화상>은… 그냥 여인이 장엄해보여서 좋았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는 자코메티 말이 좋았다.
그래서 자코메티 조각상은 다 걷고 있는 건가? 그래, 뛰지 말고 걷자. 꾸준히 걷자. 두려워하지 말고 흥분하지도 말고 걷자.
저녁에는 에어비앤비에서 미리 신청했던 타파스 투어를 했다.
그런데, 정작 음식보다는… 영어가 공용어인 것이 새삼 억울했던 투어.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호주, 미국, 영국 같이 영어권 국가드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친절히 말을 걸어주고 내가 아무리 버벅거려도 인내심을 갖고 내 말을 들어주었으나… 그들의 장벽 없는 의사소통에 내가 온전히 끼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호주에서 온 친구는 정말 악의없이 순수한 표정으로, 가장 친절하고 섬세한 말투와 함께 “유어 컨트리에서도 혹시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니?”라고 물어봄.
입에 타파스를 쑤셔넣느라 방심하고 있을 때 훅 들어온 어이없는 질문이라, 오 예쓰…하고 어버버 대답하고 말았는데. 지금 뒤늦게 생각해보니 “응! 유어 컨트리는?”이라고 말할 걸. 에잇.
너희들은 아니…? 태어났을 때부터 배운, 아니 그냥 어느 순간 의식하고 보니 내가 쓰고 있는 언어가 전 세계에서 쓰이는 공용어라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를. 혹여나 나를 보며 동양여자는 super shy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 너희들이 한국어로 말해야 했다면 모두들 백인남자는 super shy하다고 말했을 거야…
아냐 아냐 얘들아, 모두 친절했는데 내가 괜히 폭주해서 미안…
(언어와 별개로) 식당 네 군데를 다니면서 차례대로 치즈, 통삼겹살, 핀초스, 깔라마리 튀김, 하몽, 크로켓, 올리브, 스페인식 오믈렛을 먹고 수많은 와인과 맥주, 샹그리아를 마시고 왔다.
분명 혼자였다면 어려웠을테니 나름 만족스러운 경험. 하지만 막 경탄할 만큼의 미식 투어는 아니었음. 그러나 모두에게 너 정말 잘 먹는다고 칭찬받음. 동양여자 무시하지마! (아무도 무시 안 함)
혹시나 해서 담아보는 식당 정보들
- Claxon Bar (치즈, 통삼겹)
- Restaurante Los Arcos de Ponzano (핀초스, 칼라마리)
- Bar Restaurante Ponzano (하몽, 크로켓)
- Taberna Alipio Ramos (올리브, 오믈렛)
* Mazal’s Bagel
아보카도+햄+계란 조합이 실패할 리 없지. 그런데 양이 좀 많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 솔 광장 가는 길
아, 내가 스페인에 왔구나… 가 새삼 느껴졌던 거리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