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몰랐다면 죄송합니다
2023년 벼락치기를 하면서 결심했던 것 중 하나. 포르투갈 여행에서 기록했던 일기를 다시 옮겨보기!
어디든 여행을 다녀와본 분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여행지에서 쓴 글이야말로 나의 모든 있는 감성 없는 감성을 그러모으기 마련인데, 그래서 이걸 그대로 옮긴다는 게 좀 쪽팔리긴 한데, 그래도 생색내본다. 2주 다녀왔지만 마치 몇 년은 지내다 온 것처럼.
**퇴사 후 새 직장으로의 첫 출근을 앞두고 떠난 마드리드x포르투갈 여행 일기를 다시 옮겨씀
그야말로 폭우… 호우… 홍수…
아침엔 그냥 추적추적 내리는 정도였는데 갑자기 빗발이 치더니, 나중엔 그냥 누가 하늘에서 양동이로 들이붓는 정도가 됐다.
물웅덩이를 피해다니는 게 아니라 그냥 체념하고 바지를 걷고 다녀야 했음. 그동안 라면 국물을 쏟아부어도 꿋꿋이 버텨주었던 나의 뉴발란스 574도 그렇게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됐다.
사실 어딘가에 틀어박혀서 꼼짝도 하지 말아야 하는 날씨였는데, 마드리드에서의 귀한 하루를 이렇게 날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 뒤 포르투에서 더 엄청난 우기를 만날 줄은 몰랐겠지?)
그래서 프라도 미술관을 갔다가 미리 찾아봤던 파스타 맛집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거기서 다시 숙소로 가서 보조배터리만 챙긴 다음, 쇼핑몰로 향하는 일정을 세웠다. 나름 실내에서만 보내는 일정(?)이라 괜찮을 것 같았는데. 네… 뒷말은 생략…
그래도 프라도 관람은 나름 재미났다.
오디오 가이드를 듣다 보니까 네 시간가량이 훌쩍 지났는데, <시녀들> 같은 유명한 작품도 봤지만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고야, 그리고 호아킨 소로야의 <해변의 소년들>. 다른 작품들은 ‘오 그렇구나’ 하고 설명을 들으며 봤다면, 저 두 개는 나름의 정동을 느꼈달까요…
고야는 <아들을 잡아먹는 크로노스>가 워낙 유명한 만큼, 다 기괴한 것들만 그린 줄 알았는데 초기와 후기 작품들이 완전히 상반돼서 신기했다. 원래는 왕실의 전속화가로서, 귀족들의 단골 화가로서 따뜻한 로코코풍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고.
고야는 40대에 청력을 잃었고, 당시 스페인 정치는 부패했으며 나폴레옹과 프랑스 군대까지 침략해오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부유했지만 수년에 걸쳐 몸과 마음이 쇠약해졌고, 결국 시골 마을로 잠적해버렸다. 그곳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가 <아들을 잡아먹는 크로노스>라고 한다.
그림을 보면 진짜 자살하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자살하지 않았다. 몰랐다. 그리고 노후에 그림을 그리면서 안정을 많이 되찾았다고 한다. 저 크로노스를 그리면서? 의아하긴 하다.
이 그림은 고야가 죽기 전까진 시골집 밖으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고야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그림. 다시 말해 고야가 누구에게도 보여줄 필요가 없었던 그림. 왕실이나 귀족들에게 후원을 받아서 그린 것이 아닌 그림. 잔혹하고 고통스러워 보여도 누구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지 않는 그림.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먹는 끔찍한 모습이지만, 또 다르게 보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의 그림. 크로노스가 아무리 아들을 잡아먹으며 운명을 피하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옆에서 제우스는 자라나고 있었으니까.
제일 내밀한 속내에서 기괴하고 불행한 상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미래’에 대한 애착을 떨칠 수는 없었나 보다. 아니면 그냥 끔찍한 생각들을 그림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을 수도.
아픈 상태에서 그림을 그려도, 왜 고흐는 자살했고 고야는 그러지 않았을까? 고흐는 세계를 그리고 고야는 자기 감정을 그려서? 잘 모르겠다…
(*찾아보니 똑같은 고야의 그림을 두고도 죽음을 앞둔 처참한 심정으로 해석하는 분도 있고, 각기 다르게 보는 것 같다. 나도 그냥 나만의 생각을 끄적여봄)
소로야는 여기 와서 처음 알게 된 화가인데 색감이 좋아서 소로야 미술관도 한 번 더 가보려 한다.
+) 다닌 곳마다 남겨보는 한 줄 아닌 한줄평
* Toma Cafe 1
동료 분 추천으로 간 곳. 아보카도+레몬+고수씨+크림치즈+소금 토스트도 너무 맛있었지만, 종업원 오라버니 얼굴이 더욱 충격적이었던 곳. 동료는 스페인이 가우디 건축 따위나(?) 보러 가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 Matteo Cucina Italia
시장 안 깊숙이 있는 생면 파스타 맛집. 2~3시쯤 늦은 점심시간을 공략해서 갔는데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아낌없이 얹어주는 트러플. 맛있긴 겁나 맛있었지만 김치 소녀인 나는 그저 무파마 국물이 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