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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l Nov 26. 2018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버닝, 카모메식당, 에어기타, 그리고 아들러 심리학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 팬터마임


저는 수요일, 목요일, 그리고 금요일이 휴일입니다. 나머지 날에는 일을 합니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집에서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왠지 시간이 아까워 영화를 봤습니다. (왓챠플레이 요즘 볼 게 많아졌더라고요) 최근 해외에서 개봉해 호평을 받고 있는 '버닝', 국내 개봉 때도 관심은 있었지만 영화관에 가는 게 귀찮아 미뤘었는데, 덕분에 이번에 봤습니다.


종수, 해미, 그리고 벤


영화의 대사, 표정, 장면들 하나하나 주옥같았습니다. 특히 해미라는 캐릭터가 뿜어내는 에너지와 대사들은 모니터에 밑줄을 긋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초반부 술집에서 종수에게 귤을 까서 먹는 팬터마임을 보여주며, 잘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그리고 덧붙입니다.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에어 기타


한 편의 영화를 다 봤는데도 휴일의 시간은 남아있고, 체력도 남아있어서 영화 한 편을 더 봤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같아 좋아 보여요."라는 마사코의 질문에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뿐이에요."라고 대답하는 사치에의 대사 덕분에 호기심이 생겼던 '카모메 식당'을 드디어 봤습니다. 잔잔한 감동이라는 표현이 정말 잘 어울리는 영화였습니다.


마사코, 토미, 사치에, 그리고 미도리


앞에 버닝을 봐서인지, 마사코가 핀란드에 오게 된 이유가 계속 생각났습니다. 그녀는 TV에서 핀란드의 '에어기타 대회'를 보고 그 모습이 너무 즐거워 보였기 때문에, '이런 대회를 하는 핀란드는 어떤 나라일까?'라는 호기심으로 핀란드로 왔습니다. 그 대회에 참가할 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에어기타 챔피언십 2018년 우승자 나구라 나나미


에어기타 대회는 기타 없이 실제로 기타 연주하는 것처럼 퍼포먼스를 하는 경연대회입니다. 매년 가을 핀란드 북부 오울루에서 열립니다. 20여 개 국가에서 대회가 열리고 핀란드에서 결선을 하는 식입니다. 점수 체계와 규정도 있다고 합니다.


유튜브에서 참가자들의 무대를 보면 이 사람들은 기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기타가 없다는 걸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으니 무대를 즐기고 관객과 호흡합니다. 관객들도 그냥 즐깁니다. 그러면 진짜 신나니까요. 연주를 느낄 수 있고요.



망각의 힘


우리는 잊어버림으로써 기억하고 못 보기 때문에 볼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덕분에 작년 여름휴가 때 즐거웠던 경험은 기억하고, 코가 보이지만 신경 쓰지 않음으로써 앞의 풍경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코가 보이시나요?) 이 외에도 숨을 쉰다는 사실을 잊거나, 안경 낀 사람들이 안경테를 보지 않는 것 등 '있는 것'에 대한 망각은 우리의 길을 밝혀줍니다.


반대로, 팬터마임 그리고 에어기타에서처럼 '없는 것'에 대한 망각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삶의 목적


우리는 가끔 삶의 목적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무엇이든 해보거나, 혹은 무언가를 그만둬봅니다. 돈을 왕창 쓰거나, 어디론가 떠나며 삶의 목적을 되찾으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아들러 심리학의 창시자인 알프레드 아들러의 말은 찬물을 끼얹습니다.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


사실이긴 합니다. 뭐 그런데 그러면 너무하니까 아들러는 한마디 더 해줍니다.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지니고 있는 운명이라든지 임무는 없습니다. 그냥 태어났고 그냥 사는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운명이니, 삶의 의미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이 많으니 괜히 나도 뭔가 하나쯤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죠.


무엇이든 하다 보면 우연히 찾을 수 도 있겠습니다만, 차라리 삶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목적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삶을 받아들일 태도만 정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즐거운 태도라면, 정말 즐겁고 삶에 활기가 돌 테니까요. 저절로 삶의 목적 비슷한 것도 생길 테고요.



누군가 결핍된 무언가를 갈망한다면, 혹은 자신이 그러고 있다면, 이렇게 한 번 말해주는 건 어떨까요.


'그게 (어딘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게 (너에게) 없다는 걸 잊어버려. 중요한 건, 네가 그걸 얻어서 느낄 것 같은 느낌을 계속 떠올리는 거야. 그럼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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