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가기 기다리지 말자
2014년 6월, 일병 2호봉
째깍, 째깍, 째깍.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는 사람은 보통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연인을 기다리는 부류, 또 하나는 군인이다.
군대에서는 시간이 더럽게 안간다, 정말.
여기 시간에 관해 인상깊은 기억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때 거실에 앉아 TV를 봤다. 102보충대 특집이었다. 브라운관 안에서는 이제 막 입소한 군인들이 하릴없이 4일동안 대기를 하며,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방금 또 1분이 지나갔어요. 이제 00분이에요."
TV를 보며, 저기 있는게 얼마나 고역이면, 1분 1분이 지나가는 것을 세고 앉아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특별히 나랑은 관련은 없을 것 같은, 그냥, 군대는 시간이 정말 안가는 힘든 곳이구나,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10년 뒤, 그 때 그들처럼, 나도 이제 102보충대에 입소하게 됐다. 나도 똑같이 몸소 체험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상대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지말이다.
이등병 때 나는 시계를 참 많이 들여다 본 것 같다.
훈련이나 작업 혹은 일과든, 30분쯤 지나갔으려니 하고 시계를 보면, 5분 지나가 있었다. 잠시 후 이번에는 시간이 많이 지나갔으려니 싶어 시계를 들여다보면 1분도 채 안 지나가 있고 말이다. 고등학교에서 처음 야자를 했을 때 이후 처음 이었다, 이런 경험은. 시간 참 정말 안갔다.
왜 그런가 하면, 아마 군대에 입대한다는게 원하여 온게 아닐 뿐더러, 특별히 즐거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 우리 사회에 시간을 잘 잡아먹는 휴대폰이나 인터넷같은 문명의 이기를 접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을 기대하기 참 어렵다. 물론, 사실 대개 시간이 빠르게 갈 때에는, 특별히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대하지도 않는다. 시계를 들여다보지도 않는거다.
그래서 군대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더욱 느리게 간다.
사실 느리게 가는 시간들이 다 비슷하다. 아마 연인과의 이별, 사업에서의 실패, 사고후 후유증, 시험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릴 때 등이 있을것이다.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것의 의미는, 그 시간이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어둡고, 축축하며, 진통과, 많은 애를 먹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속삭이곤 한다.
'시간이 다 해결해줄거야.'
'지나가면 그것도 추억이지.'
뭐 이런 느낌의 레퍼토리다. 나도 이전에 이런 말에 어설픈 충족감과 위로를 받으며, 시간을 죽이며 보내오곤 했다.
하지만 요즘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이 말에 동의가 되지 않았다.
난 고민했다. '과연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하면 되는 걸까?' 또, '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말이 맞는걸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을것이다. 시간은 시간 오로지 그 자체이며, 다만 흘러갈 뿐이다.
아마 내가 변하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나로서 어느 한 정점에 머물러 있기 마련이다.
그럼 내가 지금 기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버리는 것? 그것은 탄식 나오는 일이다. 1년 9개월중 벌써 5달이 지나갔고, 이 시간동안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과 기회들을 포착하는 게 훨씬 건설적일 것이다. 아마 '군대 다녀오더니 훨씬 나아졌다라.'와 '군대 갔다와도 똑같네.'는 이런 태도에서 갈리지 싶었다.
그즈음 나는 슬럼프와 감정의 격동의 시간을 계속해서 보내오고 있었다. 시간은 정말 느리게 가고 있었고, 삶의 1분당 회전수는 엄청나게 급감했다. 시간이 느려지니 삶도 느려지고, 나는 이곳에서, 정적이 흐르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 정적 속에서, 나는 무엇을 건설하고 무엇을 생산해내야 할것인가?
그래서 6월의 어느날, 나는 남은 군생활의 목표를 설정했다.
첫번째, 글쓰기. 항상 마음으로만 되뇌였던 글쓰기를 시작해보자.
두번째, 영어공부. 쉬운 회화조차 못하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꾸준히 하루 2시간 이상 공부하자.
세번째, 인간관계. 고마운 가족과 지인들은 물론이고, 이곳의 선후임들과 적이 아닌 좋은 관계를 맺어보자.
그렇게 목표를 정하고 생각에 잠겼다. 전에 훈련소 교회에서 들은 말이 기억나서이다. 군대는 대개 첩첩산중에 있다. 군대에 있는 것도 인생의 첩첩산중에 있는 기분이다. 아마 인생에서 만난 첫 고비이고 큰 산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면 그곳엔 이러한 산들로 무수히 가득한 산맥이 자리잡고 있다.
아마 내게도 첫 직장 생활을 할 날이 올것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날이 오게될거다. 나도 누군가 나를 꼭 닮은 아이를 낳게 될 거고,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없을 커다란 산들을 마주할 것이다. 물론, 순간순간의 기억들 중엔 즐거움도 함께 하겠지만, 대개는 어려운 고행일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의 삶은 더욱 첩첩산중인거다.
그러니 인생은 산맥과 같다. 그리고 내가 이 산맥을 건너기 위해, 이곳 이 자리는 내가 단단히 다리 힘을 기르고, 체력을 증진할 수 있는 참 좋은 산인거다. 그러니 지금이 구리구리한것만은 아니다. 나는 언젠가 또 다른 산을 넘어야 하고, 지금 이 산에서부터 단련되어야 한다.
얼마 지나서, 생각 속에서 빠져나왔다. 내 일기를 들여다보면 늘 우울감 속에서 버텨내기 위한 글들뿐이었는데, 오늘은 희망의 한 자락을 잡은거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늘 하루는 이렇게 끝나지만, 내일은 조금 더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