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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drew Sep 29. 2015

편지뭉치

차마 치우지 못하겠다

2015년 2월, 상병 3호봉.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잘 안쓰는 물건을 손 안닿는 곳에 두는 경향이 있다. 모든 물건은 처음엔 서랍의 중심에 자리잡지만, 이후 점차 구석으로 밀려난다. 요즈음, 이걸 구석으로 두어야 하나 고민되는 물건이 하나 있다. 편지뭉치 이야기다. 




훈련소에는 펜과 편지지가 있다. 고된 훈련이 끝나고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훈련병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다들 주섬주섬 펜과 편지지를 꺼내, 못다했던 말들을 적기 시작한다. 누구는 여자친구에게, 누구는 부모님에게, 또 누구는 친구에게 적는다. 나 역시 시간일 날때면 부쩍 적었던것 같다. 그렇게 적어서 보내고나면 그리고 잠잠히 답장을 기다린다. 그 가운데 편지를 남들보다 먼저 받는 위너들이 있기 마련이고, 으레 그렇듯이, 이러한 위너들을 부러워하며, 다음번엔 나 역시 저들과 나란히 하기를 기대한곤 했다. 


그리고 기다리던 편지를 받았다. 받는 편지 하나, 받는 편지 둘에는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편지는 바깥 세상에서 날라오는 유일한 소통구. 나는 편지를 통해 그때 참 많은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불침번을 서며, 조교 몰래 라이트펜을 꺼내 편지를 적기도 하고, 때로는 편지 속 사진을 보며 눈물 훔치는 친구들도 있었다. 아무려면 무슨 행동이든 편지에 관해서라면 충분히 이해가 됐다. 20대에 때늦은 세상과의 단절과 분리는, 마치 사랑과 인정과의 분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편지는 이 분리에 대한 불안감을 안심시켜주고 위로해주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비록 낡고, 구시대적인 수단으로 비쳐지지만 말이다. 


나는 남에게 빚지는 것을 어려워하는 성격이다. 그때 훈련병 시절, 고맙게도 나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편지에 답장을 꼬박꼬박 해주었다. 아직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가족과 친구에게 아직도 빚진마음 한가득이다. 장난끼 있는 나이지만, 그들에겐 함부로 대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을'이었을 때, 나에게 손을 뻗어 사랑을 베풀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편지를 두세번씩 읽으며 그들에 대한 존중과 존경,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다.



이제 편지를 주고 받는건, 현대사회에선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에 허락된 행위이다. 어쩌면 더 특별해진걸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거의 모든것이 전자화되어서, 손으로 자신의 마음을 적는다는 것이, 이제는 많이 수고로운 세대다. 그뿐 아니다. 우표를 사는 수고, 주소를 찾아내는 수고, 편지지 고르는 수고, 우체국에 부치러 다녀오는 수고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이 모든걸 하다보면 진절머리 나서 때려치우기 십상이다. 요즘 세상에 언제 마지막으로 편지를 부쳐보았겠는가. 5주만 있으면 나올텐데 이걸 왜 하고 있나 생각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거다. 나도 그래서 친구가 군대에 갔을 때, 편지까지 적었다가 이 과정들이 너무 귀찮아서 고이 접어둔 편지 두어장이 아직 서랍속에 있고 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어려움과 귀찮음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해로울정도로 자잘한 과정들의 귀찮음 총량을 넘어서는 애정과 헌신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보낸 편지에서 나는 그 애정과 헌신을 느끼기에, 편지 앞에서 난 숙연해질수 밖에 없다. 이 작은 종이에는 그와 나와의 관계, 함께 보내온 시간, 담겨진 마음, 웃음과 눈물이 모두 뒤섞여 있다. 



그래서 나는 훈련소를 마치고도 수어번 편지로 그들과 대화했고 편지에 매료됐다. 어두운 골짜기를 걸어가는 듯했던 훈련소와 이등병때의 시간들은 편지가 위로해주었다. 이 어두움 속에서 지팡이 노릇을 했고, 마음이 상했을 때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톨스토이의 말은 옳았다. 내가 그 때 그 시간을 견뎌냈던 것은, 외부에서의 공급된 사랑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편지를 통해서 내게 배달되었다. 나는 사랑을 받았고 또한 사랑을했다. 그러니 그 시절은 정녕 무가치하지 않은 것이다. 


긴 고민이 끝났다. 요즘 너무 실용적으로만 살았던것 같다. 편지뭉치를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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