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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drew Sep 11. 2015

설국에서

108년만의 폭설 속, 자대에서의 첫 여정


2014년 2월, 이병 2호봉 



누구에게나 눈에  대한 기억은 아름답다. 눈 싸움 하던 기억과 눈 사람 만들던 기억들, 눈 위에 누워본 적도 있었고 눈썰매도 참 많이 탔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릴 때, 길을 걸어도 참 기분이 좋다. 눈은 바라만 봐도 행복감을 주며, 눈에 대한 관념은 늘 고혹적이고 따뜻했다.



기록적인 사건들은 늘 내 삶에 멀리 있었는데, 군에 입대하며 나는 처음 그런 역사적인 사건을 마주하였다. 108년만의 폭설, 그 때의 양양은 흡사 설국이었다.


14년 겨울에 영동지역은 그렇게 온통 눈으로 뒤덮였다. 자대 배치를 위해 미시령을 넘는 길은 눈과 눈의 연속이었다. 부대가 가까워질수록, 세상은 더욱 하얗게 물들고 있었다. 늘 부천에 살던 나는 난생 처음 그리 많은 눈을 구경할 수있었다. 부대의 정문을 통과하자, 병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자기 키만큼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치워놓을 공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이제야 새삼 군대에 온 게 실감이 났다. 말로만 듣던 제설작업을 바라보며, 조금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눈을 타고 오는 덕택에 부대에 늦게 도착했다. 자질구레한 신고를 마치고 저녁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밥은 따뜻했고, 반찬은 정갈했다. 새로운 이들과의 첫 끼였다. 간소한 소개를 하고나니 어느새 잘 시간이었으며, 무척 긴장한 그날, 나는 잠에 일찍 들었다.


 다음 날 조금 일찍 깼다. 자는동안 또 다시 눈이 제법 많이 내렸다. 평소보다 일찍 기상하여 도구들을 받아 제설하였다.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는데 인상 한번 좋게 남겨보겠다고 열심히 눈을 치웠다. 눈을 치우는 가운데서도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그 공간에서 대화는 부재하였고, 오직 일사분란하게 눈을 치우는, 적막하고 어스름한 겨울 새벽이었다.  눈을 치우면서 ,계속 이렇게 눈이 내리다간 눈 위를 헤엄쳐 지나가게 생겼다는 생각했다. 허기가 질때쯤 아침을 먹고,  그날은 하루 종일 눈만 치웠다. 지독한 하루였다. 하루동안 치울 양을 치우고 나니 온몸이 쑤셨다. 그러나 내일에도, 앞으로도 이 눈은 계속 치워야만 했다.


저녁에 맞선임이 분리수거장에 데려갔다. "가만히 지켜봐." 작은 방갈로, 어두운 공간, 저녁 8시. 막내들 여럿이 한 눈에 지저분해 보이는 장갑을 끼고 쓰레기통을 부어 쓰레기를 분류하고 있었다. 선임들은 그 주위를 빙 둘러서 있었다. 갓 전입온 나는 옆에서 하는 일을 보면서 배우라 하였다. 선임들의 눈은 이곳 저곳을 바쁘게 움직였다. 조금만 작업이 느려보인다 싶으면 그 후임을 일으켜 가차없이 혼냈다. 나는 잘못한 것 없이 그냥, 바짝 쫄려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선임이 나의 말꼬리를 잡더니 나를 두고 20여분간 혼을 냈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선임들이 나를 빙 둘러쌈으로서 자아내는, 완전히 몰려있는 기분과 감정은 최악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정신없이 욕을 먹어야 했다. 그 시간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 내 혼은 정신에서 분리되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끝나고 돌아가 자리에 앉는데, 생전의 첫 경험에 내 이성은 강한 거부반응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그와 관련없이, 주위는 여전히 눈으로 인해 차가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내겐 지독한 서운함과 우울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하소연할 곳이란 부재했고, 나에겐 자살에 대한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이곳, 설국은 야속하게 나를 반기지 않았고, 그간 쌓인 눈은 여전히 내 키만하여 좀처럼 녹을줄을 몰랐다.


그렇게 하루가, 또 하루가 지났다. 하루는 제설하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데 선임이 내게 편지를 건냈다. 어머니에게 온 편지였다. 봉지를 북 찢어 편지를 읽는데 별 내용 없이 격려의 말뿐이었다. 그러나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무척 울었다, 그날. 이 암담하고 어두운 공간에서 내가 뚫고 이겨낼 자리는 없어보였으며, 나는 무척 고독했다. 그리고 그 눈물이 끝은 아니었다.


그 주 일요일, 교회에서도 나는 눈물을 훔쳤으며 왜 항상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걸까라는 생각과, 내 주변을 감싸는 두려운 어두움들을 나는 도저히 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설국은 음산했고, 차가웠다. 나에게 기대할 누구의 환대와 따뜻함, 그리고 반김도 부재하였다. 나는 공간속에서 사회와의 거리감을 깊이 인식하였고, 어두움 속에서 나는 한없이 밑으로, 또 밑으로 내려만 갔다. 나는 어떠한 용기도 가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게 손을 건네는 이 없다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버티며 지냈다. 조금씩, 눈이 사그라들고 있었고, 가끔, 봄향기가 코를 스쳤다.


2월은 매일이 힘들고 지친 하루의 연속이었다.그러나 사회에서처럼 한번 보고 끝날 관계가 아니기에. 나는 모든 어려움과 관계들을 극복해야만 했다. 나는 단지 벼텨냈고 그렇게 매일의 하루가 지나갔다. 변화가 있었다. 조금씩 혼이 나는 횟수가 줄어들고 웃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차츰 알게됐다. 이곳에도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호의적으로 대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이곳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누군가인 나는 차츰 누군가인 그대들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그건, 제법 나쁘지 않았다.


3월이 다가오며 눈이 조금씩 녹았다. 절대 녹지 않을 것 같던 키만한 눈들이었는데,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직도 무척 높지만, 이대로 조금씩, 점차 녹아가리란 희망을 갖게됐다. 풀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봄기운이 완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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