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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drew Sep 15. 2015

잊을 수 없는 임병장 사건

비오는 밤, 판초우의를 덮고 자다

2014년 6월, 일병 2호봉



 나는 6월의 비오는 밤, 전우들과 판초우의를 덮고 흙탕물에서 잠을청하였다. 그러나 살인, 그 평범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추악한 범죄의 이면은, 결코 내 기억속에 추억도, 낭만도 아니었다.



군 생활간 잊을 수 없는 일의 베스트를 꼽으라면 단연코 나는 임병장 사건을 꼽을 것이다. 사건이 충격적이기도 했고, 내가 실제로 작전에 참여하였으며, 후속 파장 역시 지대하였기 때문이다.


 15년 6월 21일은 쾌청한 토요일이었다. 22사단 GOP 00소초의 경계작전이 끝날 무렵, 그곳에서는 총성 수어발과 수류탄 폭발음이 울렸다. 삽시간에 소초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임병장은 그간 원한을 품었던 이들, 그리고 같이 근무했던 이들을, 소초를 뚜벅뚜벅 걸으며, 총으로 조준하여 한명씩 사살했다. 그리고 그는 소초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소초를 떠나 고성 이름 모를 산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우리 군단은 당연히 비상이 걸렸고, 상급부대에 있던 우리는 다음날 아침, 즉각 출동 준비태세를 갖추고 조를짰다. 우리는 임병장에 대한 포위망의 한축을 담당해야 했다.

나도 3인 1조로서 조에 속하였는데, 그 조라는 것이 전역이 2일 남은 병장과 내가 싫어해왔던 3개월 선임이었다. 하필 내가 불편해 하던 이들과 한 조라 마음이 탐탁치 않았지만, 상황을 타고 흐르는 긴장은 그러한 사소한 불편 정도는 크게 의식치 않는듯 했다. 우리는 일요일 아침, 돌아올 기약 없는 고성행 버스에 올랐다.



사실 조금은 긴장을 했지만, 우리는 상급부대였기에 들을 수 있는 정보의 폭이 넓기는 했다. 우리는 출발하기도 전, 이미 예하부대가 임병장을 포위했고 조만간 잡을 수 있을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수많은 병사들이 포위를 했다면, 한명 잡는 것쯤은 손쉬운 일이기 때문에 금방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날 밤이 어떤 밤이 될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우리는 생각없이 버스 안에서 모 부대에 정차하여 작전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그가 곧 잡히겠거니 안일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루한 것은 시간의 흐름과 벌써 질리는 전투식량뿐이었다. 그러나 1시간, 2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고, 그렇게 어느새 날이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2014년 6월 22일 밤은 브라질 월드컵의 대튀니지 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아직 축구경기를 볼 수는 있으리라는 희망이 조금은 남아있을 무렵, 우리는 새로운 소식을 전해들었다. 임병장이 포위망을 뚫고 탈주하였다는 비보였다. 그 때 우리에게 축구에 대한 희망은 싸그리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고성 땅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고, 임병장이 00국도를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총을 들고 밤새 경계로 사주를 주시해야 했다. 역시 새로운 것이 반드시 더 나아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고조되는 여름 밤,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었다. 우리 조 세 사람은 삽으로 참호를 파고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의 기지를 만들었다.


이제 이곳에서 돌아가며 자고 경계를 서며 밤을 지새워야 했다.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각자. 하늘에서는 비가 한방울씩 쏟아졌다. 추적, 추적, 추적.


건너 산에서 끊임없이 총성이 일정 간격을 두고 울렸고, 우리는 주섬주섬 판초우의를 덮어쓰고 전방을 주시했다. 침묵이 흘렀고 마음이 빈곤했다.


상상속의 나는 군인으로 멋있는 모습이었으나 실제는 녹록치 않았다. 실상은 비내리는 진흙탕 참호 속에서 판초우의를 덮고 있는 세 남자만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영웅도, 멋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단지 그곳에 존재했을 뿐이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군과 아군이 대치한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민족간에 분단도 모자라서, 아군이 아군을 쏘고 그를 잡으려고 수많은 아군이 다시 출동하는 현실은 지독히 역설스러웠고 메스꺼웠다. 생각이 많은 밤이었다.

 그 날 밤은 무척 길었고, 생전 처음 비를 맞으며 흙탕물과 판초우의를 뒤덮고 잠에 들었다. 잠에 들기 전에 내일 아침엔 사정이 조금 나아지길 잠시나마 기대했던 것 같다.


아침엔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어쨌든 기나긴 밤은 결국 지나갔고, 네끼니 째 같은 것을 청하였지만, 그래도 하루를 어떻게 넘겨냈기에 나쁘지 않았다. 마음이 놓인 것은 임병장은 일개 한명의 병사였고, 그래도 날이 밝았으므로 그가 잡히는 것은 다시 시간 문제일 것 같았다.


우리는 국도를 등에 지고 다시 경계를 섰으며, 다른 사람들 역시 오늘은 집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조금 더 밝아보였다. 역시 사람은 다 비슷했다. 비슷한 고민과 비슷한 두려움을 느끼며, 각자 말은 안했지만 그러한 밤을 지샜을 것이다. 아침엔 비슷한 기대를 가지고 일어나서 표정이 저리 밝은 것일테이고.


아니나 다를까 오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임병장은 다시 포위됐다. 두번 연속의 작전 실패는 없었고, 그의 가족까지 동원되어 그의 자진투항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임병장은 두어시간여의 대치 끝에 자신의 옆구리에 총을 쏨으로서 사건이 일단락됐다. 그는 즉시 체포됐고, 우리 또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복귀하고 거울을 봤는 데 몰골과 차림새가 처참했다. 나 또한 뉘집의 자식인데, 이런 꼬락서니를 누가 알아줄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물론, 그것이 군생활간 마지막으로 들은 회의감은 아니다.


 이후 부대에서는 여러 후속 조치가 가해졌고, 우리는 전에 없던 정신교육과 부대행사들을 치렀다. 또, 여러 새로운 규정들이 들어오고 내무생활 일절이 많이 변화했다.우리는 임병장 사건을 통해 부대생활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고, 여전히 임병장은 간간히 추억팔이나 회상을 할 때 요긴히 쓰이곤 한것 같다.


며칠 후, 뉴스를 보다 임병장이 스크린에 잡혔다. 그가 나오자, 생활관 사람들이 다들 집중해서 스크린을 본걸로 기억한다. 하얀 안경에 얄쌍한 얼굴, 왜소한 체구. 그는 상당히 평범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그때 고성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쳐 나왔으며, 이틀간 산을 헤매며, 비까지 온통 맞았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쾌청한 날, 수백여 아군에게 포위되어 가족과 대면하였고, 자신의 옆구리에 총을 들이밀었다.


나는 다시 메스꺼운 기분이 들었고, 그날 밤에 오랜만에 잠을 설쳤다.


7달 후, 우리는 훈련차 GOP를 가게 됐다. 우연찮게도 목적지를 가며, 임병장사건이 일어났던 그 소초에 잠시 쉬고 가게 됐다.


소초는 초라한 겉과 달리 안은 멀끔했고 제법 화사했다. 안은 놀랍도록 평온하고, 병사들은 한가로이 작업 또는 정비중이었다. 7달 전 그런 아픔을 겪은 공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침묵으로, 조용히 소초를 빠져나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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