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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drew Sep 15. 2015

빨간 수첩

이등병 때 나의 빨간약

2015년 3월, 상병 4호봉



이등병들은 누구나 수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내 빨간 수첩을 갖고있다.



캄보디아에서 살다 온 친구가 얼마 전, 13개월 차 후임으로 들어왔다. 온지 1주일 쯤 됐을 때의 일이다. 내가 일과가 끝나고 생활관에 들어왔는 데, 그 후임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궁금하여 그 친구의 행동을 지켜봤다.

 

보아하니 우리 생활관에 각 침대마다에는 병사의 인적 사항이 적혀있는데, 그것을 일일확인하면서 선임들의 이름과 입대일을 적고 있었던거다. 아마 새파란 이등병인 그에게, 누군가 선임들의 입대일을 알아두는 게 좋다고 제 나름의 조언을 해준 모양이었다. 그런데 죄다 자기보다 선임들이니 물어보기는 그렇고, 자기 나름으로 수첩을 꺼내 일일이 적고 있었.


 보기에 안쓰러워서 그의 수첩에다가 우리 중대원의 이름과 입대월을 적어주고, 숙지해두는 게 좋지만 부담을 갖지는 말라고 일러두었다. 내가 안 적어주었다면 이 친구는 전 생활관돌아다니며 지금까지도 맞지도않는 월번을 외우고 있었을 것이다.


수첩에 적어주고 난 후, 그의 수첩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 앞장엔 제 맞선임이 일러준 주의사항이 빼곡이 적혀있었다. 또 자신이 해야할 업무들에 관하여도, 외워둬야할 사항들도 그 수첩엔 빠짐없이 기록돼있었다. 이제 내가 한장을 적어줌으로서 이 친구의 수첩엔 기억해야할 목록이 한장 더 더해졌다.


그러자 내 빨간수첩이 생각났다. 이제는 서랍 맨 밑바닥에 있어, 찾는 일 없는 그 수첩을 꺼내서 펼쳤다. 입대 전에 사두었던 내 빨간 수첩, 이제는 시간이 지나 많이 낡고 부스러졌다.


 나 역시 그 친구처럼 이등병 때 빼곡하게 수첩을 채워넣었었다. 지인들의 전화번호부나 주소도 적혀있었고, 내가 생각하는 미래 구상, 그리고 여러 고민들이 적혀있었다. 한편 매일의 실수했던 것을 적어넣기도 했고, 꼭 암기해야할 것과 주의 사항들 역시 빠짐없이 수첩엔 들어있었다.


수첩의 앞장엔 군 입대전, 지인들이 적어준 응원이 적혀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추억에 젖었다.

그 당시 수첩은, 나에 단지 적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내 이등병 때는 말하거나 웃을 일이 지독하게도 없었다. 대화와 웃음은 최소한의 인간적 교감인데, 그것은 나에게는 제공되지 않았다.


생활관 분위기는 늘 살벌했고, 나는 어떤 날에는 목소리가 작다 혼나고, 어떤 날에는 제식이 엉망 아니냐며 혼을 들었다. 나를 구실로 하여 내 윗선임들을 싸그리 혼내기도 했다. 모든 것은 처음이라는 '관례'였지만, 잘 몰랐던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음산하고 두려운 환경이었다.


이등병 언젠가는 중대장이 다 불러놓고, 웃음체조를 해보자 하여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웃음체조를 하는데, 그동안 하도 안웃어본 나머지, 웃음체조에서의 그 웃음과 웃는 스스로가 너무나 어색했던 기억이 남는다. 얼굴의 근육들이 정말 오랜만에 꿈틀하는, 그런 느낌. 그때는 그런 나날들이었다.


나는 많이 힘들고 지쳐있었다. 말동무가 될 동기도 끝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하필 내 월번만 말이다. 모든 문제는 스스로 부딪히고 해결해야 했다. 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나에겐 용기와 역량이 필요했.


 그래서 힘든 하루가 끝나고 저녁이 되면, 나는 늘 빨간 수첩에 무언가를 적곤했다. 좋은 말씀과, 격려의 말과, 힘이되는 문구들을. 그렇게 마음을 다 잡고, 그날의 실수했던 것은 내일에는 반복치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수첩에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 마음과 기분들을 꼭꼭 눌러 담았다. 새나가지 않도록.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나는 나와의 대화를 수없이 시도하고, 내가 평가하는 나와 다른 이가 평가하는 나를 목도했다. 그러면서 배워야할 것을 배우고, 생각해야할 것들을 생각했다. 빨간 수첩과 마주하며, 나는 조금씩 성장했고, 한발짝씩 앞으로 나아갔다. 사실 지독하게 힘든 작업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다 상병이되고, 나는 빨간 수첩을 서랍장 맨 밑에 넣어두었다. 더 이상 볼 이유가 없다 생각했던 것같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그 후임으로 인하여 수첩과 재회한 것이다. 오랜만에 꽤 오랜 시간 수첩과 시간을 보냈다.


수첩을 만지작 거렸다. 수첩을 넘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수첩 한장 한장의 무게가 가볍지 않기 때문이었다. 수첩 한장엔 애환이, 수첩 한장엔 눈물이, 또 한장엔 그리움이 녹녹하다. 1년도 더 지난 지금, 내 빨간 수첩은 이제는 오래된 파이마냥 눅눅해졌고, 수첩엔 그때 꼭꼭 눌러놨던 내 감정들이 고스란히 바래져 있었다.


사랑이 고갈된 이 곳은 내게 늘 어두운 터널과 같았고, 빨간 수첩을 보다보면 힘겨운 시절을 견뎌낸 나를 마주할 수 있어 좋았다. 그걸로 충분히 좋았다. 그 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그 시간 역시 내 삶의 소중한 한조각임을 수첩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때와 생활관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고, 다소 밝아졌다. 수첩을 다시 서랍장 밑에 넣어두었다. 또 다시 꺼내기 전까지,수첩에 먼지가 소복히 쌓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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