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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drew Sep 15. 2015

전역모 이야기

병사의 보상심리의 발로

2015년 4월, 상병 5호봉  



군대에서 자대에 들어가면 내 의도와 상관없이 아빠, 그리고 아들이 있다. 사실 나는 이 관계를 참 좋아한다. 군대에서 별다른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인격적 관계를 맺는 독특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전역모'라는 존재 때문에 불편하기도 하다.



아들 군번이란 자기보다 꼭 1년 후 입대한 자신의 후임을 의미한다. 그러니 자기보다 1년 선임이면 아빠, 1년 후임이면 아들인 셈이다. 아빠와 아들은 관계가 돈독하다. 아빠 선임이 PX에 아들을 데리고 가기도 하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져주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군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군대에서의 독특한 온정 심리인걸까.


그렇지만 선임들은 자신들의 사랑이 가끔 오해받는다. 단지 아들에게 전역모를 받기 위해서 잘해주는 위선으로 비쳐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내 선임들도 가끔 내가 아들에게 잘해주는 걸 보면, 장난으로 '전역모 받으려고 그러는 거지'라고 놀리기도 했다.

내가 후임병일 때 선임들은 전역 전날, 자기 아들에게 전역모를 선사받곤 했다. 그들은 사비를 털어모아 3-5만원에 이르는 모자를 나름 디자인해 자신의 아빠 선임에게 만들어서 전역 선물로 주었다. 전역모를 받는 선임은 의기양양해했고, 받지 못하는 선임은 풀이 죽어있는다. 그래서 누구누구 선임이 전역모 받는 지 여부로 우리는 그의 군생활을 판가름 하기도 했다.

 

물론 일종의 금전 거출이므로, 명료한 부조리였지만 음성적으로 자행되고 있었다. 관계가 돈독하여 '우리 아빠에게는 꼭 해주자', '남들보다 더 멋있게 만들어주자'는 후임이 있는 반면, '해주자니 꼴 보기 싫고 안해주자니 주변사람들에게 눈치보여' 골머리를 썩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 상급부대에서 여기에 메스를 대기 시작했다. 전역모를 선물하는 것을 대표적인 부조리로 꼽으며, 철폐를 예하부대에 지시하였고, 우리 부대에서도 전역모에 관한 설문조사 및 문제제기등이 실시됐다. 징계까지 가지는 않았으나 여러 건수가 적발됐고, 전역모는 더욱 음지로 숨어들어가야만 했다. 내 선임들은 이제 '나는 전역모를 받을 수 있을까'라는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사실 전역모는 유용성과는 거리가 있다. 전역날 집에 가는 길에 쓰고, 이후에는 예비군 소집때나 사용한다. 그러니 모자 한번 쓰는데 4천원쯤 지불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능이 좋아 수류탄 파편을 막아주는 것도 아니고, 디자인은 패션의 입장에서 보면 우스울 뿐이다. 인천공항에서 전역모를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전역모란 전역날 하루의 기분을 내기 위해 후임들의 돈을 거출해 만드는 사치품인게 사실이다.


하지만 선임들은, 병사들은, 결코 전역모를 포기하지 않는다. 상당히 집착한다. 나 역시 전역할 때 전역모에 대한 마음을 뗄 수 있을 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내 아들이 해준다고 하면 못 이기는 척 전역모를 받을 것 같다. 부끄럽지만 그게 본심이다.


그러니까 이건 사실 보상심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도, 부대 안에서도, 군인은, 병사는 그리 명예롭지 않다. 20대의 시간을 통제된 공간에서 보내며, 그 안에서는 갈굼과 계급사회, 그리고 단절감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고생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다. 사회에서는 군인이라고 하면 우습게 본다. 그러니 군인으로의 시간에 허탈감을 느끼고, 다들 전역만을 기대하고 목메여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가끔 질린다. 병사를 소모품으로 생각하고, 허드렛 일을 시키는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간부들에게. 왜 우리 군은 간부가 병사의 적이 되어 버렸는가.

또 나는 우울하다. 1년 9개월 동안 나라의 의무로 고향을 떠나, 쥐꼬리만한 보수로 근무를 서는데, 사회는 어떠한 명예나 대접도 내게 허락하지 않는다. 나를 소개하면 '아, 군인이세요?'라고 답하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 게 이제는 지독하게 싫다. 


세상은 여전히 군복무를 도피한 이들이 득세한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현역복무를 한 이들의 고생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이가 많지 않다. 그래서 병사들은 선임에게 전역모를 건네며, 서로를 위로해준다. 전역모는 군대에서 받는 마지막 선물이고, 군생활에 대한 보람과 의미를 담아 만든 물건이다. 그것은 부조리이므로 한편으로 없어져야할 대상이지만, 사실은 병사들에게 강한 보상거리를 자극하는 재화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전역모가 없어져도 다시 병사들 사이에는 새로운 것이 등장할 것이고,  또 다른 보상거리를 갈구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군인은 여전히 명예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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