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처음과 끝으로 이루어진다. 중간중간은 목적이라 하기 어렵다. 그러나 때로는 길 자체가 목적지가 될 수 있다.
김포발 2시 10분 비행기. 목적지, 제주 항공.
집에서 나왔다. 겨울이기에 짐 가지가 가벼웠다. 눈이 내리지 않아도 설렘과 여행에의 상상 나래를 펼치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기분이 부드러웠다. '올레길을 걸어야지.' 생각 하며 전철에 발을 디뎠다.
그렇게 한아름 안은 설렘을 땅에 떨어뜨린 건, 전철을 3번 환승하는데 3번 다 눈앞에서 놓쳐서, 비행기가 지연되어 1시간 반 가까이 기다려서도 일정 부분 포함했을 거다.
그러나 더 중요했던 건 첫 혼자 여행의 두려움이 나를 붙잡았다. 초행길부터 계속된 변수들이 길을 막으며 두려움이 겹치자, 무언가 나를 막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혼자서 잘 해낼 수 있을까? 가지 않도록 나를 제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는 신마저도 꺾지 못하듯이, 나는 나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해나가야만 했다. 물론 신이 나를 막아선 건 아니지만.
비행기를 타면 늘 그렇듯 두려움과 몽롱함이 몰려왔다. 오늘도 그랬다. 그 기분을 피하고 싶어 잠에 들어야만 했다.
' 비행기에서 졸다 죽으면 참 어이없겠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사진 몇 장 건지고는 졸다 깼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구름 위를 날고 있어 차창 밖이 부드러웠다. 빙수 과자 같았다. 잠시 펼쳐진 동화 같은 바깥 풍경.
모든 비행기는 내려온다. 특별한 순간들이 그러하듯이. 동화 속을 빠져나와 제주에 발을 내딛었다. 묘한 설렘을 품고 공항을 나왔다. 오늘의 목표는 공항부터 시작하는 올레 17번길을 걸어 용두암을 보고, 성산항 인근에 묵는거다. 날씨가 적당히 차다. 바닷 바람이 습기를 머금었다. 걷기 적당했다. 많이 춥지 않은 날씨다.
오후의 테마는 걷기다.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해안 도로를 따라 걷는 건 꽤나 좋았다. 가끔은 바다를, 가끔은 바닥을, 가끔은 앞을 바라보았다. 혼자 여행은 가고 싶을 때 가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다. 온전히 내 걸음으로 갈 수 있어 좋았다.
그러다 멈추고 싶었다. 어느 해안 부두였을까. 해안변에 잠시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다. 작은 한기가 느껴졌고, 파도는 끊임없이 몰려왔다. 규칙적으로, 조금은 자유롭게. 나는 나를 비우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니 멈췄던 거다.
바다를 보며 도르래를 타고 우물로 내려간다. 바닥은 아득하고 심연은 지대하다. 무언가를 볼 수 있을까 싶어 도르래를 계속 내려보지만, 어두운 심연만 조우한다. 바닥에 닿을까 두려워 다시 우물 위로 올라간다. 우물 밑으로 내려가는건 익숙치 않다.
다만 조금 더 맑고 따스할 때 왔으면 더 좋았을걸. 쓸쓸한 겨울이 내 마음과 조화롭지 않다.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다시 일어나 올레길을 걸었다. 차분히, 조용하게. 아무도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용두암을 향했다.
오후 5시. 용두암 정취는 생각보다 별로였다. 중국인 관광객으로 가득하여 시장에 들어온 기분. 여행의 흥취가 팍 깨졌다. 내가 바라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 조금 더 있다가는 번잡함에 휩쓸릴 것 같았다. 그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제주 땅값이 많이 올랐겠네.' 중얼거리며 용두암을 빠져 나왔다.
계획을 바꿔야 했다. 더 걸어야 했으나 더 걷고 싶지 않았다. 일찍 마무리하고 성산으로 향했다. 표지판이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휴대폰에 의지해 어떻게 정류장을 찾아갈 수 있었다. 성산까지 거쳐야할 버스 정거장 75개. 차창 밖을 모두 즐기는 건 욕심이었고, 고단함을 덜기 위해 잠에 들었다. 그렇게 잠시 몸을 뉘었다 깨보니 성산에 다가왔다. 성산 바다가 일렁였다. 저녁 공기가 차다. 바람이 세차게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