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별 #9

by 윤군

“그럼 언니는 여기 전 세입자가 아니라 그 사람 여자친구였던 거예요? 와~ 대박!”


수아는 리액션이 너무 좋았다. 처음 보는 사람과는 사무적인 대화 이외에 말을 잘 섞지 않는 그녀였지만, 수아는 정말 사소한 주제(어제는 어떤 색깔 스타킹을 신었는지, 오늘 점심을 먹은 후에 커피를 마셨는지, 아메리카노였는지, 카라멜 마끼아또였는지, 혹은 사무실 의자에는 팔걸이가 있는지)까지 끊임없이 질문했고, 그녀가 짧게 대답할 때마다 표정과 몸짓, 목소리로 더 긴 대답을 하게 만들었다. 의외로 수아와의 대화는 재미있었고, 오늘 처음 만난 것 때문에 오히려 친한 친구들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난 이런 수다를 떨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지.’


고양이 캐릭터 얼굴을 한 간이 식탁 아래에는 어느 새 빈 맥주 캔 다섯 개가 굴러다녔다. 수아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녀도 술이 약한 편이 아니었지만, 비 내리는 밤과 수아와의 수다에 왜인지 모르게 조금씩 취해가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천천히 마시자.”


그는 술이 약했다. 주종에 상관없이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졌다. 대학교 신입생 때에는 맥주 한잔에 취해 집 근처 어느 벤치에서 자다 그곳의 원래 주인이었을 고양이들과의 사투에서 살아남았다는 무용담도 있었고, 회사에 들어가서는 고기를 굉장히 잘 굽는 척하는 연기로 회식자리에서 겨우겨우 살아남았다. 오히려 그녀가 술을 더 잘 마셨고, 그녀는 그와의 술자리(그는 매번 다음에 하자고 하는)를 즐겨했다.


“자기야~~~ 나 취하면 자기가 우리 집까지 바래다 줘야해~~~”


평소라면 전혀 들을 수 없는 날아가는 듯한 말투로 그가 말했다. 애교가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가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술에 취했을 때뿐이었다. 친구들끼리 술자리가 있어도 한잔 이상을 마시지 않는 그가 자신과 있을 때면 이렇게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그녀는 좋았다.


‘이런 모습은 나밖에 모를 거야.’


이상한 우월감이 드는 것과 동시에 앞에 앉아있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귀엽게 보였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안경 너머로 감길 듯 감기지 않는 눈꺼풀, 그럼에도 분명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 그리고 얼굴만큼 빨간 입술.


“쪽”


닿는 순간 달달하며 부드러웠고, 떨어지는 순간 씁쓸했다. 그의 놀란 얼굴과 함께 한 그와의 첫 입맞춤은 사과소주 맛이었다.



“그런데 그 오빠는 왜 언니한테 헤어지자고 한 거예요?”


“전혀 모르겠어. 싸우지도 않았고, 뭐가 힘들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없고. 그게 궁금해서 여기 온 건데...”


“오빠 대신 저를 만난 거죠? 근데 언니도 참 대단하다.”


“뭐가?”


“헤어진 지 3년이나 지난 남자를 찾으러 온 거잖아요. 저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내 청춘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함께하고, 모두 가져가 버린 사람이니까.’


그 말은 입 속에서만 맴돌았다. 이 말을 꺼내면 스스로가 너무 비참해질 것만 같았다. 찬란하게 빛났던 그녀의 인생이 지금 어둠 속에 묻힌 것처럼 보일까 봐 그녀는 다른 대답을 했다.


“아까 들어왔을 때 가구나 배치가 예전이랑 똑같아서 깜짝 놀랐어. 그 사람이 그대로 두고 갔다고?”


“네.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고 계속 연락드렸는데 안 받으셔서...”


‘나도 마찬가지지.’


헤어지고 난 후에 새벽마다 젖은 베개 옆에 누워 카톡 메시지를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웠다. 며칠을 반복하다 실수로 메시지를 보내버렸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메시지 옆의 숫자 ‘1’은 지워지지 않았다. 혹시나 늦은 밤에 오는 전화를 받지 못할까 봐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잤던 날도 많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전화가 온 적이 없었다.


“아... 맞다!!”


수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뭐가?”


“그... 이사 왔을 때, 가구 말고도 그 오빠 걸로 보이는 물건이 몇 개 있었거든요. 방 청소하다가 나왔는데... 혹시나 해서 따로 놔둔 게 있어요.”


수아는 책상 서랍을 열고 두리번거리다 이내 옷장 위에서 작은 수납 박스 하나를 꺼냈다. 박스 위에는 먼지가 뿌옇게 앉아있었다. 걸레를 가져와 먼지를 닦아내자 수아의 것으로 보이는 ‘전 주인 것, 아마도?’라는 글씨가 나타났다. 수아는 수납 박스를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언니가 한 번 열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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