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별 #10

by 윤군

​짙은 갈색의 수납 박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눈앞에 놓인 수납 박스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흔히 볼 수 있는 갈색 박스인데, 그녀에겐 마치 그 안에 무엇인가 위험한 것(치명적인 독을 가진 뱀이나 거미, 혹은 다리가 4개 이상인 벌레들)이 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뚜껑을 여는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것들이 튀어나와 그녀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죽겠지.’


갑자기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두 배는 더 빨라진 것 같았다. 호흡도 가빠지고, 금방이라도 멎을 것만 같았다.


“안 열어 보세요?”


수아는 뭔가 재미있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아를 보니 아까의 긴장감은 마치 착각인 듯 호흡은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고, 심장도 평소처럼 천천히 뛰고 있었다.


‘혼자 있었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을 지도 몰라.’


수아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낮은 한숨과 함께 지문이 묻어나는 갈색 박스 뚜껑을 열었다.


겉면과는 다르게 박스 안은 하얀색이었다. 어두운 색이 아니란 것에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며 그녀는 박스 안의 물건들을 하나씩 꺼냈다. 노란색 옥스퍼드 노트, 연필 2개, 지우개, 모나미 볼펜, 그리고 작은 액세서리 상자 하나. 그녀는 노란색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어떤 것이든 적혀있을 거라 생각했던 노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어.”


“이 상자는 뭐예요? 액세서리 상자 같은데?”


작은 상자에는 ‘J’사의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액세서리 브랜드였다. 그래서 그가 곧잘 선물해주던 브랜드이기도 했고. 상자를 열자 낯익은 귀걸이 한 쌍이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눈썹달과 별 모양으로 만들어진 귀걸이. 그리고 옆에는 조금 큰 알약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예쁘지? 거울 봐봐.”


“응. 예쁘다. 근데 이거 짝이 안 맞는 거 같은데? 미안한데 한쪽만 다시 바꿀 수 있어?”


그녀의 생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어떤 특별한 날도 아닌데 그는 귀걸이 한 쌍을 선물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좋아하는 모양의 귀걸이. 그냥 차고 다닐 수도 있었지만, 왼쪽과 오른쪽 눈썹달의 방향이 똑같은 점이 그녀의 신경에 거슬렸었다.



‘그때가 5월이었으니까, 헤어지기 2달쯤 전이네.’


“우와~ 예쁘다. 오빠가 언니 깜짝 선물로 주려고 사놨던 걸까요?”


“선물은 맞는데 깜짝은 아니야. 한번 받았던 거야. 귀걸이 짝이 안 맞아서 바꿔달라고 했었거든.”


“응? 어디가 짝이 안 맞아요?”


“여기, 달 모양이. 난 대칭으로 하는 걸 좋아해서.”


“언니 의외로 고집 센 편이네요. 나 같으면 그냥 했겠다. 이건... 약이에요?”


“그거 약 아니야. 캡슐 속에 짧은 메모를 남길 수 있는 편지 같은 거야.”


그와 나는 이런 식으로 짧은 편지를 나누곤 했었다. 가벼운 안부를 묻거나, 그날그날의 심정을 남기거나.


‘빈 캡슐일까? 아니면 예전처럼 어떤 메모가 들어있을까?’


수아의 기대감 어린 눈빛을 맞으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캡슐을 열었다. 돌돌 말린 종이가 나왔다. 종이를 펴자 그의 것임이 확실한 글씨체가 보였다. 익숙했다. 하지만 낯설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에 눈을 감았다. 그가 그토록 그리웠던 걸까? 3년 전에 쓴 그의 글씨체에서도 그리움이 묻어나왔다.


“언니, 봐도 돼요?”


그녀는 말없이 수아에게 종이를 넘겼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서 미치겠는데, 네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 그래서 더 추운 밤이야. 네가 와서 안아주었으면... 2012.5.30


수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짧은 침묵을 만들어준 수아에게 내심 고마워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추슬렀다. 담지 않으려고 했지만 목소리에 허탈함이 묻어 나왔다.


“어차피 별 기대는 안했는 걸. 그래도 귀걸이랑 편지는 찾았으니까.”


“언니, 잠깐만요.”


수아는 노란색 노트를 들고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옆으로도 보다가, 손으로 가만히 노트를 만져보기도 했다. 그러더니 연필을 눕혀 노트를 칠하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원래 영화 같은 거 보면 이렇게 하잖아요. 가만있어보세요.”


연필 끝의 흑연이 수아의 손을 따라 좌우로 움직여가자 아마도 그가 썼을 글자가 하얗게 나타났다. 대부분은 흐리거나 글씨가 겹쳐 알아볼 수 없었지만, 수아는 용케 하나의 숫자를 찾아냈다.


033.260.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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