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260.XXXX
아까 쪽지에 적힌 것과 같은 필체라는 것은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필체가 확실했다. 멍하니 숫자를 쳐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수아가 말했다.
“아는 번호예요?”
“아니, 033이면 강원도 아닌가? 거기엔 아는 사람도 없는데...”
“오빠 고향이 강원도라던가?”
“그것도 아니야. 서울 토박이였어.”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노트에 적힌 끝 4자리를 눌렀다. 저장되어 있는 번호는 없었다.
‘누구 번호지? 뭐라고 말하면 될까? 그를 알고 있냐고 물으면 되나?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면 어쩌지? 혹시 내가 모르는 엄청난 빚을 받으려는 사채업자일 수도 있어.’
아무 문제가 없었던 (혹은 없었던 것 같았던) 우리의 연애를 일방적으로 깨어버린 그의 이별 통보. 이삿짐도 챙기지 않고 마치 쫓기듯 비운 집. 자신의 상상력이 3년 전에 몇 번이고 해봤던 나쁜 방향으로 가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그녀는 전화번호를 하나씩 누르기 시작했다. 033.260.XX...
“언니, 언니. 지금 전화하려고요? 지금 많이 늦었는데...”
수아의 말에 시계를 보니 시간은 11시 20분을 지나고 있었다. 간이 식탁 밑에 굴러다니는 빈 맥주 캔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 혼자 마신 맥주 캔이 3개가 넘었다. 오랜만의 수다에 정신을 놓고 있던 자신을 자책하며 그녀는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전화는 내일 해볼게. 그나저나 미안해. 너무 늦었네.”
“아니에요. 저도 오랜만에 재미있게 수다 떨었는걸요.”
“아니야. 나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그녀는 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을 보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익숙한 (지금은 익숙해서 가슴 한쪽이 아픈) 수아의 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난 왜 수아의 방에서 그의 흔적을 찾으려 하는 걸까.’
벽지와 커튼, 창문 구석에 고양이들을 보며 '안녕'이라는 인사를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수아가 말했다.
“언니, 그러지 말고 자고 갈래요?”
“오늘은 자고 가면 안 돼?”
갑자기 수아의 목소리와 그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저녁 맛있었지? 그 집이 원래 매일 줄 서서 먹는 집이야. 오늘은 운이 좋았어."
족발에 사이다.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가는 남자에게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의 말대로 면목역 근처에 있는 족발 집은 정말 맛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소주를 시키고 있을 정도로. 남들이 보면 우습겠지만 그녀는 소주를, 그는 사이다를 잔에 따르고 건배했다. 저녁을 먹고선 기분 좋은 취기를 느끼며 그의 집 앞을 산책했다. 밤바람이 무척 좋았다. 그리고 그는 소주 몇 잔과 시원한 밤바람에 기분이 좋아진 그녀를 보며 좋아하고 있었다.
"들어가서 커피 한 잔 하자. 너 좋아하는 사과도 사다 놨어."
고양이 세 마리가 있는 창문을 보며, (그녀의 기분을 깨지 않겠다는 그의 배려로) 얼음이 3개나 넣어진 커피를 마셨다. 입 속에 가득 넣은 얼음을 굴리면서 금요일 저녁의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같이 깔깔(그는 큭큭)대고 웃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11시가 되었다.
“나 이제 들어갈게.”
그녀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고, 그는 그녀가 ‘안녕’하는 손을 잡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오늘은 자고 가면 안 돼?”
“저는 괜찮아요. 저한테 피해 준다는 생각은 전혀 할 필요 없어요. 솔직히 요즘 너무 쓸쓸하기도 하고, 오히려 전 언니가 자고 갔으면 좋겠는 걸요.”
그녀는 조금 당황했지만, 한편으론 이 방에 조금 더 머물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에 자신이 잊고 있던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말은 반대였다.
“아니야. 너 내일 학원 수업 가야지. 나도 출근해야 하고.”
“내일은 강의 없어요. 언니는 집보다 여기서 출근하는 게 가깝지 않아요?”
‘35분 더 가깝지.’
“옷도 옷이고, 스타킹도 없고...”
“옷은 지금 다려놓을게요. 스타킹은 아래 내려가서 사오면 되죠.”
수아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쩌면 그녀는 수아가 자신을 잡아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내심 바라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무언의 기대에 못 이기는 척 하며 말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