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별 #12

by 윤군

“샤워는 저기서 하면 되구요, 온수는...”


“알아.”


그녀는 살짝 웃으며 전등 스위치 아래 작은 버튼을 눌렀다. 그것을 본 수아는 재미있다는 듯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아... 맞다. 재미있네요, 우리 집인데 언니가 더 잘 아는 것 같아요. 수건은 이거 쓰세요.”


샤워기에 물을 틀자 잠시 후 따뜻한(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뜨거운)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집을 계약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자랑했던 것은 방의 크기나 넓은 창문이 아닌 급탕온수기였다. 저혈압이 있어 아침마다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그에게 따뜻한 물로 하는 샤워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녀는 긴 머리를 틀어 올려 묶고 샤워를 시작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없는 집에서 또 이렇게 샤워를 할 줄이야.

선반 위에 놓인 바디워시는 뜻밖에도 그녀가 좋아하는 매화향이었다. 몇 년 전에 절판되어서 요즘은 구하기 힘든 제품이었다. 오랜만에 그 향을 맡으니 정말 3년 전으로 되돌아 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수아에게 어디에서 샀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짧은 샤워를 마쳤다. 세면대 위에 거울을 보니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사랑해. 오늘도 기분 좋은 하루 보내.


그는 항상 그녀보다 일찍 일어났다. 그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면, 항상 거울 한쪽에 그녀만을 위한 아침 메시지가 나타났다. 손가락 끝으로 눌러 썼을, 김이 서려야만 볼 수 있고 온기가 식으면 사라질 그 짧은 몇 글자에 그녀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거울 한 구석을 바라보았다. 아무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추억이니까.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수아는 벌써 요를 깔고 잘 준비를 마쳐놓고 있었다.


“저 바디워시 어디에서 샀어?”


“아... 그 매화향 나는 거요?”


“응. 나 그 향 정말 좋아하거든. 몇 년 전부터 제품이 안 나와서 다른 걸 쓰고 있긴 하지만.”


“아... 사실 제가 산 건 아니구요. 집에 있던 거예요. 한 박스나.”


“...... 가구랑 같이 두고 갔나 보네.”


그녀는 수아에게 말하듯 혼잣말을 했다. 다행히 수아도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눈치 빠른 녀석’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내가 좋아하는 향이라고 쌓아뒀던 걸까? 박스 채로 사둘 거였으면 대체 왜 헤어지자 한 건데?’


분위기를 바꿔 볼 생각이었을까, 수아가 갑자기 ‘짝’ 소리를 내며 박수를 쳤다.


“이제 우리 자요. 언니가 이쪽에서 주무세요.”


“아니야. 네가 그 쪽에서 자. 거기가 외풍이 덜해.”


그녀의 고집에 수아는 두 손을 들고 ‘내가 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옮겼다. 수아를 따라 기다란 베개가 같이 자리를 옮겼다.


“그건 뭐야?”


“아.. 부끄러운데... 혼자 자는 게 외로워서 끌어안고 자는 일종의 남친(?)이에요.”


수아의 얼굴은 귀 밑까지 빨개졌다. 그녀는 그걸 보고 가만히 웃기만 했다.


“잘 자.”


“언니도 안녕히 주무세요.”


오랜만에 마신 술 때문인지 혹은 어색한 낯익음 때문인지, 그녀는 약간의 뒤척거림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방 안에는 이내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남았다.



그녀의 등 뒤로 따뜻한 편안함이 전해져 왔다. 등에서 시작해서 온 몸을 감싸는 온기. 그리고 편안함. 옆으로 누워있는 그녀를 뒤에서 가만히 안고 있던 그가 말했다.


“깼어? 조금 더 자. 아직 일어날 시간 멀었어.”


그녀는 그 말에 돌아누워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머리를 쓸어내렸다. 토닥토닥. 토닥토닥. 규칙적인 박자에 다시 잠이 올 것 같았다. 아니, 잠이 든 것 같았다. 잠이 들었지만 그녀는 그의 얼굴과 하얀 벽지,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커튼 사이의 창문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꿈이니까.’


꿈을 꾸면서 이것이 꿈이라고 자각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옆에 있었으니까. 그녀는 눈을 감고 자는 동시에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리운 얼굴. 그리웠던 얼굴.’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고 싶었지만 잠이 든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가만히 그녀를 토닥이던 그는 그녀가 잠이 들자 조심스럽게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잠이 든 채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조금 뒤, 그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는 것을 알았다.


‘울고 있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자고 있느라 아무 말을 할 없었다. 그의 어깨는 한참을 떨었다. 그리고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울음 섞인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떡해.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



목덜미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4시 30분. 일어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등 뒤가 이상하게 더워서 뒤돌아보니, 수아가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남친이라던 베개는 어디로 갔는지, 그녀를 베개라 생각하고 껴안은 것 같았다.


‘이래서 그런 꿈을 꾼 건가?’


분명 그녀가 본 적 없는 기억이었다. ‘꿈이니까 당연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무엇인가 꺼림칙한 기분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시간이 쌓이자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점점 밝아졌다.




매거진의 이전글그녀의 이별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