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기획안을 마무리하고, 회의 자료를 만들었고, 사업부 미팅에도 참석했지만 그녀는 오늘 무슨 일을 한 건지, 어떻게 한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단어 그대로, ‘그냥’ 시간이 지나갔다. 정신을 추스르기 시작했을 때는 벌써 7시가 넘어 있었다.
“너 괜찮냐?”
사수인 김과장 특유의 까칠한 목소리였다. 겉으로는 아닌척 하지만 속정은 깊은, 신입사원인 그녀를 툴툴대며 지금까지 챙겨준 좋은 선배였다. 잦은 야근에 힘들어할 때마다 ‘로또 1등 되면 너한테 10% 준다’며, 기분 좋은 상상을 하게 해주기도 했었다.
“아까 연이도 말하던데, 내가 봐도 너 오늘 정신이 어디 가출한 것 같다.”
“몸이 별로 안좋아서요.”
“내일 뭐 해야 되지?”
“...... 잠시만요.”
그녀가 회사 다이어리를 열고 있을 때 옆에서 듣고 있던 막내가 끼어들었다.
“대리님, 내일 10시에 임원회의, 4시에는 사업전략회의 있어요.”
“응, 고마워, 연아. 10시 임원회의 자료는 팀장님 피드백 받아서 아침에 조금 수정하면 돼요.”
“자료 수정은 연이 시키고, 전략회의는 내가 들어갈게.”
“네?”
그녀는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내일 쉬라고. 팀장님한테는 내가 말해 놓을 테니까, 내일 연차 쓰고 주말까지 쉬어. 평소 같았으면 다이어리 찾을 필요 없이 바로바로 나오잖아. 5년 동안 너 봤지만 오늘처럼 이러는 거 처음 본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
“맞아요, 대리님. 내일 일은 저한테 맡기시고 얼른 퇴근하세요.”
선배와 막내의 쿵짝에 어이가 없었지만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까칠한 김과장의 목소리와 생기발랄한 막내의 목소리, 짧은 대화 몇 마디에서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짧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퇴근 준비를 했다. 혹시 필요할지 모르는 자료는 메일로 보내고, 짙은 보라색 블레이저를 걸치며, 그녀는 사무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핸드폰을 보니 수아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언니, 우산 두고 갔어요.
전화는 해봤어요? 어딘지 알게 되면 저한테도 말해주세요. 너무 궁금해요.
언니, 저 이따가 강남에 갈 일이 생겨서 시간 괜찮으면 저녁 같이 먹어요. 퇴근할 때 연락주세요.
마지막 메시지가 온 시간은 3시간 전이었다. ‘핸드폰을 확인할 정신도 없었구나’ 생각하며, 그녀는 수아에게 카톡을 보냈다.
미안, 카톡을 지금 봤어. 지금 퇴근하는데 어디야?
밖으로 나오자 보도블럭 위를 조금씩 적시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막 내리기 시작한 비 냄새를 맡으며 ‘우산을 새로 살까? 이정도면 맞으면서 가도 괜찮겠는데?’ 생각을 하는 동안 수아에게 카톡이 왔다.
저 지금 강남역 근처예요. 밖에 비 오는데 언니 우산 없죠? 제가 그 쪽으로 갈게요. 대신 저녁은 언니가..ㅋㅋ
그래, 저녁은 맛있는 거 먹자. 선릉역 1번 출구로 나와서 쭉 걸어오면 돼. 오면서 연락해.
‘넉넉히 20분이면 오겠지?’
그녀는 빌딩 안으로 들어가 비 내리는 테헤란로를 바라보았다. 그를 만났던 어느 날도, 지금처럼 비오는 거리를 바라보며 우산을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아니, 우산을 가져 올 그를 기다렸었다.
오늘 우산 안들고 갔지?
응. 오늘 비 온다는 얘기 없었는데..
오후에 온다더라. 몇 시에 퇴근해? 우산 들고 갈게.
그는 늘 그렇듯 작고 투명한 비닐우산을 들고 나왔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그 우산을 쓰는 것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천천히 걷는 그녀의 옆에서, 발을 맞추어 함께 걷는 그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회색 빌딩숲 아래를 걸었지만, 녹음이 가득한 수목원 한가운데를 걷는 기분이었고, 반짝이는 가로등 불빛은 마치 불꽃놀이를 보는 듯 했다. 역시나 그의 반대쪽 어깨는 젖어갔고, 조곤대는 목소리에 피곤했던 하루는 어디론가 사라져 마냥 행복했었다.
“언니, 오래 기다렸죠?”
수아 손에 들린 우산은 그날 그가 들고 온 우산과 같았다. 오늘 아침 그녀가 깜빡하고 두고 온 우산. 작고 투명한 편의점 비닐우산이었다.
“아니야. 저녁 뭐 먹을래?”
“오다가 찾아봤는데, 여기 근처에 족발 맛있게 하는데 있대요.”
“아.. 어딘지 알아. 이쪽으로 가자.”
사람이 가득 찬 식당이었지만 다행히 두 사람이 겨우 앉을 만한 자리가 있었다. 족발과 소주를 시켜놓고, 수아가 말했다.
“전화해봤어요? 누가 받아요? 저도 전화해볼까 하다가 그래도 언니한테 듣는 게 낫겠다 싶어서..”
수아는 숨을 쉬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놔두면 몇 분을 혼자 말할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수아의 말을 끊었다.
“응. 아까 네 카톡 보고서. 병원이었어.”
“네??”
“노트에 왜 그 번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병원이더라고. 국립춘천병원.”
수아는 뭐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
“국립춘천병원이요?”
“응, 왜?”
“우리 할머니가 거기 계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