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 잔을 쭉 들이키며 수아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조금 길고, 조금은 우울한 이야기였다.
지금은 시험 준비 때문에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지만, 수아의 집은 부산이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느라 바빴고, 때문에 수아는 부모님보다 할머니와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겨울이면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서 할머니와 별 모양의 다이아몬드 게임을 하며 몇 시간을 보냈고, 드문드문 난 할머니 흰머리를 뽑거나 어깨를 주무르고 받은 용돈으로 친구들과 군것질을 했다. 아이스크림이든, 과자든 꼭 한입을 남겨와 할머니를 드리곤 했다. 엄마가 해준 밥보다 할머니가 해준 밥을 더 많이 먹었다. 언젠가 할머니가 몸이 아파 며칠 병원에 있을 때는 엄마 밥이 입에 맞지 않아 그냥 라면을 먹기도 했었다. 할머니는 수아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같이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왜 할머니가 멀리 춘천까지 갔는지 알아요? 한마디로 버린 거예요. 엄마가 할머니 병수발 들기 싫어서 멀리 춘천에 내다 버린 거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비어 있는 잔에 술을 채웠다.
“부모님 마음도 이해는 가요. 저도 공부한다는 핑계로 할머니 병문안 안 간지 벌써 3년이 넘었는 걸요.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그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위로를 할 수 있는지 생각을 해봤지만, 뻔한 대답 밖에 할 수 없었다.
“부모님도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야.”
수아는 반쯤 찬 술잔을 마저 비우고는,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마주하게 된 침묵에 어쩔 줄을 몰랐다.
‘이럴 때 그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오늘 같은 날은 아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냥 가만히 안아줘. 그 어떤 말보다 네 온기가 필요해.”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녀는 조용히 수아의 손을 잡았다. 손은 생각보다 차가웠고,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떨림은 가라앉았다. 고개를 든 수아의 눈 주위는 빨갛게 변해있었다.
“언니, 내일 휴가라고 했죠? 괜찮으면 저랑 같이 춘천 갈래요?”
“응?”
그의 노트에 왜 그 번호가 있었는지, 어떤 이유가 있다면 전화로 물어보는 것보다 직접 찾아가보는 게 낫지 않겠냐, 주말인데 바람이나 한번 쐬러 가자는 등의 말로 수아는 그녀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보다, 수아가 했던 마지막 말에 그녀는 춘천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오랜만에 할머니 보러 가고 싶은 건데, 다 핑계 대는 거예요.”
다음 날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역시나 보이지 않는 펄튼 우산 대신 비닐 우산을 집어 들었다. 10시에 맞춰 청량리 역에 도착하니 수아가 먼저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색 우산을 든 수아는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할머니 보러 간다는 생각에 잠이 안 오더라구요.”
반쯤 감긴 눈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수아가 말했다. 그녀도 잠을 못 자긴 마찬가지였다. 그가 남긴 흔적을 찾아간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서울 밖으로 나가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녀는 (누군가 묻는다면 아니라고 하겠지만) 예상치 못한 여행에 약간 들떠 있었다.
“그런데 언니, 그 우산 좋아해요?”
“응?”
“어제 봤을 때도 생각했는데... 뭔가 언니는 더 고급스러운(?) 우산을 쓰고 다닐 것 같아서요.”
‘보통 그런 우산을 들고 다니지.’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달랐다.
“빗방울 떨어지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게 좋아서.”
역 앞에서 간단하게 늦은 아침을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샀다. 얼음을 오도독 소리 나게 씹으며, 1시간 동안 그녀를 춘천까지 데려갈 기차에 올랐다. 수아는 많이 피곤했는지, 기차가 출발하고 나서 십분 쯤 말을 하다가 이내 조용히 잠이 들었다.
‘얘는 밖에서도 무방비구나.’
그녀는 입을 벌린 채 잠이 든 수아를 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찰칵’하는 소리에 놀랐는지 수아가 눈을 떴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쿡쿡’하며 소리 낮춰 웃다가 핸드폰에 이어폰을 끼고 ‘오늘의 추천 음악’을 틀었다. 차창 밖으로는 나무와 건물과 빗방울이 함께 어울려 스쳐지나 가고 있었고, 마침 이어폰에서는 그녀가 좋아했던, 하지만 오랜만에 듣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별 헤는 밤이면 들려오는 그대의 음성. 하얗게 부서지는 꽃가루 되어 그대 꽃 위에 앉고 싶어라. 밤하늘 보면서 느껴보는 그대의 숨결......
“...... 어둠이 찾아들어 마음 가득 기댈 곳이 필요할 때, 그대 내 품에 안겨 눈을 감아요. 그대 내 품에 안겨 사랑의 꿈 나눠요.”
박수를 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부드럽고 차분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빠져 있었다. 아니, 마치 술을 마신 것 마냥 그의 목소리에 취해 있었다.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와 사방에서 들리는 풀벌레 울음소리, 나뭇가지 사이에 걸린 달빛까지 아름다운 밤. 둘이서 아무도 없는 공원을 산책하다가 뜬금없이 노래 불러달라는 그녀의 부탁(아닌 요구)에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불렀던 노래. 잘 부른 노래는 아니었지만, 그 밤과 바람, 나뭇잎과 풀벌레, 달빛, 그녀 모두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노래였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한 곡 반복’을 누르며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비 내리는 철길 위로 춘천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