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별 #16

by 윤군

그녀는 비 내리는 길을 걷고 있었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는 미끄러웠지만 그녀는 용케 넘어지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내가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 거지?’


넘어지지 않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자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뿌옇게 흩어지는 노란 가로등 불빛 너머로 눈에 익은 작은 공원과 수아의, 예전 그의 집이 보였다.


‘꿈이구나.’


‘노래를 듣다 잠이 들었나 봐’ 생각하면서도, 혹시 수아처럼 입을 벌리고 자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꿈에서도 이런 걱정을 한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웃겼다. 그리고 꿈이니까 ‘혹시 그를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바로 앞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3층까지 한걸음에 올라간 그녀는 301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내친 김에 그녀는 문고리를 잡았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마침 잠겨있지 않았는지, 아니면 꿈이라서 그런 건지 너무 쉽게 문이 열렸다. 잠시 동안 열린 문 안쪽을 보던 그녀는 마치 고양이처럼 (꿈이라 그런지 어차피 발자국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살금살금 문 안으로 들어갔다. 파티션 너머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지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크지 않았다.


그녀는 방 안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어두운 방안에 커튼 사이로 노란 가로등 불빛이 스며들었다. 낡은 옷장과 책상 위에 노란색 옥스퍼드 노트가 보였고, 넓은 창문 앞에는 커튼이, 한쪽 구석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다른 두 마리를 보려고 커튼을 열었을 때, 그녀는 창 밖에서 멍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응?’


어딘가 낯익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파티션 너머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그녀는 어디에든 숨고 싶었지만, 한 칸짜리 작은 방에 그녀가 숨을 곳은 없었다. 허둥대는 그 짧은 시간에 불이 켜지고 그가 들어왔다. 청바지에 남색 패딩, 분명히 그날 보았던 모습 그대로지만 뭔가 미묘하게 달랐다.


‘표정이 달라.’


아마도 조금 전까지 그녀에게 ‘우리 그만 하자.’라고 말했던 그는 감정을 모두 닫아버린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그의 얼굴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울음을 억지로 삼키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꿈이라서 그래.’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신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그녀는 조금 더 자세히 그의 표정을 보려 했지만 곧장 불이 꺼졌다. 그는 패딩을 벗지도 않고 벽에 기댄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잘 했어. 잘 한 거야.




“언니, 언니.”


그녀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수아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사람들은 선반 위에 올려둔 가방을 꺼내며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음악과 함께 안내 방송이 나왔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남춘천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소지품을 두고 내리시지...


“미안, 잠깐 졸았나 봐. 여기서 내리면 돼?”


“네, 남춘천역 앞에서 병원 셔틀버스를 타면 돼요.”


밖으로 나오자 구름이 걷히면서 조금씩 해가 비치고 있었다. 수아는 비가 그쳐서 다행이라며 선물용 과일 한 바구니를 샀다. 셔틀버스를 타고 30분을 더 가서야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은 산자락 한쪽에 위치해 있었다. 도심에서 꽤 떨어져 있었지만, 오히려 환자에게는 좋을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건물 에는 환자복을 입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아는 3년 만에 온다는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쉽게 본관 건물을 찾아 들어가 프런트에서 면회 신청을 했다. 그리고는 곧 울상이 되어 그녀에게 달려왔다.


“언니, 죄송해요.”


“응? 뭐가?”


“몰랐는데, 면회가 직계가족만 된다고 해서...”


“그래? 괜찮아.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있을게.”


“금방 갔다 올게요. 참, 아는 간호사 언니한테 오빠 얘기도 물어보고 올게요.”


“그래, 고마워.


그녀는 건물 밖으로 나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비가 막 그친 뒤라 흙과 나무 냄새가 더 진하게 났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천천히 한 바퀴 돌자 한쪽 구석에 놓인 벤치가 보였다. 산책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주변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생각을 했다.


‘그는 왜 이 병원 전화번호를 적었을까?’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많았다. 그의 친구 혹은 친인척이 여기 환자였다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아팠다거나.


‘그가 아팠던 거라면 이 멀리까지 올 이유가 있었을까?’


“아가씨.”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서 옆을 보니 어느 샌가 환자복을 입은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고?”


“아... 아니에요.”


“아이긴... 내 옆에 앉아있는디 전혀 모르는 거 같디만. 내 한번 맞춰볼까? 남자제?”


“네??”


그녀가 당황해하자 할머니는 다 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고 나이 때 고민이라 해봤자 몇 개 없다 아이가. 아가씨처럼 예쁜 처녀면 머스마 문제네 뭐. 내한테 한 번 얘기해 봐. 내가 이래 봬도 젊었을 때 여러 남자 울렸다카이.”


“아... 아니에요.”


“아이긴, 뭐가 아냐. 내가 심심해서 그러니께 기냥 옛날 얘기해준다 생각하고 얘기해봐. 혹시 아나? 우리 아가씨 고민거리에 딱 맞는 답 줄지. 가끔은 늙은이의 경험이 도움이 될 때가 있는기라.”


그녀는 망설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히려 방금 처음 봤기 때문에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는 게 쉬웠을 지도 모른다. 수아에게 한번 이야기해서인지 그녀는 짧지만 길게 정리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한참을 생각하던 할머니가 말을 꺼냈다.


“우리 아가씨는 왜 그 남자를 찾으려고 하는 기고?”


“처음에는한테 헤어지자고 한 이유가 뭔지 듣고 싶었는데, 글쎄요...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냥 보고 싶은 건지도 몰라요.”


“...... 늙은이의 오지랖이라 생각하고 들어봐리. 시간이란 놈은 지나치게 이기적인기라.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모두에게 불공평하지. 뭔 말인지 알겠나?”


“네...?”


“그니께... 그짝이 찾는 그 남자가 아가씨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기라. 아가씨랑 그 남자의 3년은 달랐을 테니께. 그래도 그 놈을 찾고 싶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녀가 할머니의 말을 듣고 생각에 빠질 때, 뒤에서 수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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