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할매!!”
뒤를 돌아보니 수아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달려오고 있었다. 멀리서도 ‘다다다’하고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다 큰 가시나가 뭘 저리 급하게 뛰어 올꼬.”
할머니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혼잣말을 내던졌지만, 얼굴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수아는 벤치 앞까지 달려와서 그대로 할머니를 와락 안으며 말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수아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매, 내 수아다.”
“그래, 그래. 우리 이쁜 손녀딸. 우얀 일로 여까지 왔노? 가깝지도 않은디.”
“할매 보고 싶어서 왔지. 몸은 괜찮나?”
“늙어가지고 몸이 괜찮을 턱이 있나?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니는 공부 잘 되나?”
할머니와 손녀딸. 조손 간의 대화를 보며 그녀는 마음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이 할머니와 수아의 얼굴을 오갔다. 딱 꼬집어서 어디가 닮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묘하게 두 사람은 서로 닮아 있었다.
‘분위기. 속마음을 쉽게 말할 수 있게 하는 분위기가 닮았어.’
그젯밤 수아에게 했던 이야기며, 조금 전까지 할머니에게 했던 이야기. 누군가에게 쉽게 하지는 못할 이야기를 이 두 사람에게는 말할 수 있었다. 차이라면 수아는 보채면서, 할머니는 편안하게 들어줌으로써 말을 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이 병원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이, 그리고 처음 이야기한 사람이 수아의 할머니라는 것이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을 할머니와 이야기하던 수아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그녀에게 말했다.
“언니, 우리 할머니예요. 할매, 서울에서 친하게 지내는 언니야.”
“안 그래도 니 오기 전까지 이 아가씨랑 재밌는 얘기하고 있었다. 근데 아가씨가 수아랑 같이 왔다니 묘한 인연이네.”
“그렇네요. 아까 말씀 정말 감사드려요.”
“둘이서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요?”
“니는 몰라도 된다. 근데 할미 보러 온다면서 빈 손으로 왔나?”
“아, 맞다. 과일 사왔는데, 병실에 두고 왔다.”
“얼른 가져와봐라. 밖에서 바람 좀 쐬면서 먹자. 병실은 너무 답답하다카이.”
수아는 다시 ‘다다다’하며 병원 건물로 달려갔다. 수아가 과일을 가지러 간 사이, 그녀는 아까 할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할머니, 아까 하셨던 말씀이요..”
“응? 어디까지 했었지?”
“제가 찾는 사람이 제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 그러니까. 뻔한 거지. 외모가 변했을 수도, 혹은 생각이 변했을 수도 있지. 아니면 아가씨가 가진 기억과는 다른 추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그게 제일 문제라.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이런 말도 있잖아. 그리고... 그리고...”
구름 낀 하늘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민 해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말을 줄였다. 그녀는 ‘무슨 말씀을 더 하실까’하고 기다려 보았지만, 할머니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보통이라면 하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수아처럼 할머니를 보채기로 했다.
“그리고요?”
“추억은 다르게 적히고. 그리고... 그런디 아가씨는 누구신가?”
아까와는 다르게 할머니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수아가 깎은 복숭아를 들고 왔다.
“할매, 과일 가져왔다.”
“복숭아네. 나 복숭아 좋아하는디 고마워라. 근디 아가씨는 누구시길래 내한테 과일을 다 깎아줄까?”
“할매, 내 수아다. 할머니 손녀딸 수아.”
“수아? 수아는 서울에 있는디.”
수아는 처음보다 더 물기 어린 목소리가 되었고, 그녀는 계속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지만 국립춘천병원의 옛 이름은 춘천정신병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