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괜찮으셔?”
“네. 산책도 하셨으니까, 이제 낮잠 주무실 시간이에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기가 어려 있던 수아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대로 돌아왔다. 오늘 아침에 들었던 밝은 목소리.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목소리 너머의 안타까움을 보았다. 애써 밝아진 수아가 안쓰러웠다.
“미리 이야기 안 해서 미안해요.”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괜찮아.”
내심 수아의 배려가 고마웠다. 이곳에 오기 전에 정신병원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녀는 어떤 상상을 했을까? 온갖 나쁜 상상들로 춘천에 올 수나 있었을까? 수아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이 그녀에겐 배려가 되었다.
“그리고, 아까 오빠에 대해 물어봤는데요......”
“응.”
듣고 싶다는 마음과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와 관련된 진실을 마주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망설임. 혹은 불안함. 얼굴에 드러났을까?
“말해도 돼요?”
“응. 괜찮아.”
괜찮다는 말과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언니, 잠깐 이쪽으로...”
그녀는 수아를 따라 비어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있던 6인실과는 달리 병실은 작았지만 침대가 하나뿐이었다. 넓은 창으로 맑게 개고 있는 하늘이 보였다. 침대 옆에는 작은 책상이 있고, 그 위에는 하얀색 노트북이 놓여있었다. 책상 옆에는 책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과 기형도, 김영태의 시집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모두 그녀가 읽어본, 그리고 그가 좋아했던 책들이었다. 그녀는 기형도의 시집을 빼어 들었다. 책갈피가 81페이지에 꽂혀 있었다. '빈 집', 기형도의 시 중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였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어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여기가 원래 우울증이나 알콜 중독, 치매 전문 병원이에요. 그리고 이 병동은 치매를 앓는 어르신들만 있는 병동이구요. 아는 간호사 언니라고 해봐야 할머니 담당하시는 언니 밖에 몰라서, 혹시나 하고 물어봤는데...”
“응.”
목소리에서 시작된 떨림이 손끝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팔짱을 끼며 떨림을 감추려 했지만, 수아는 이미 보았는지 머뭇거리며 말을 하지 못했다.
“괜찮으니까, 말해줘.”
“네... 이 병동 간호사 언니들이 모두 오빠를 알더라구요. 3년 전에 입원했대요. 여기 환자들 중에서 가장 젊다고...”
“응”
그녀는 생각보다 담담한 자신의 모습에 당황했다. 그리고 그녀가 겉으로 표현하지 못한 당황함을 오히려 수아가 보여줬다.
“이상하지 않아요? 여기는 치매 전문 병동이라구요. 그런데 오빠가 이 병동에 입원했다니까요.”
그 말을 듣고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그녀는 수아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담담했던 게 아니라,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오빠는 치매, 아니 알츠하이머였던 거예요.”
자신을 잃어가는 병. 방금 했던 말도 기억하지 못하고, 매일 가는 곳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친한 친구나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병. 결국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병. 그가 알츠하이머라고?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하는 현실임이 분명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쩌면 수아의 할머니를 보면서, 이 병원의 이름을 알면서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당황하고 부정하는 대신 병실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그럼, 여기가...”
“네. 여기가 오빠 병실이래요.”
‘상관없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내가 알아볼 수 있잖아. 어쩌면 아까 수아 할머니처럼 잠깐이라도 정신이 돌아올 수 있으니까.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라도. 얼굴 보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돼. 아무렇지 않게 대하자. 당황하지 말고, 그를 더 당황하게 하자.’
그녀는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
“그런데 언니......”
“응?”
수아가 또 머뭇거리는 게 보였다. 이 세심한 아이는 또 무슨 말을 하려기에 이렇게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걸까.
“괜찮아. 여기 와서 그를 찾은 게 어디야. 너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또 무슨 일인데?”
“...... 4일 전에 오빠가 없어졌대요. 병원에서도 찾고 있는데, 경찰에 실종 신고까지 했다고......”
기대를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까지의 당황과 불안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일까?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