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별 #19

by 윤군

늘 들려오던 시계 소리도, 대로변을 지나는 자동차 소리도 없었다. 숨을 쉬고 있는지도 모를, 그 어떤 소리도 없는 고요함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혹시라도 이 고요함이 깨어질까 조심히 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보였다. 건물 천장이야 다 비슷하겠지만 그녀가 처음 보는, 낯선 천장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베갯잇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조용한 공간이 깨져나갔다. 그녀는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병실, 그리고 그의 침대였다.


‘아... 나 쓰러졌었구나.’


수아의 이야기를 듣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그 뒤로 그대로 잠이 들었거나, 어쩌면 정신을 잃은 걸 수도 있겠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일어났다. 혹시나 하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지만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다. 핸드폰을 켜보니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시간보다 1시간 정도 더 지나있었다.


‘수아 번호가...’


그녀는 최근 발신 기록을 찾다가 이내 핸드폰을 놓았다. ‘괜히 수아 시간을 빼앗지 말자. 나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라며 스스로 낸 답에 납득했다. 어쩌면 수아는 그런 이유에서 자리를 비웠을지도 몰랐다. 이제 완연하게 해가 비치는 창밖을 보며 작은 병실 안을 몇 바퀴 서성이다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비슷하네.’


책장 안에 책들이 정리된 모습은 3년 전에 그의 집에서 봤던 것과 다를 게 없었다. 1, 2층은 소설이나 시집 등의 인문서적, 3층은 전공서적. 크기가 큰 책은 왼쪽, 작은 책은 오른쪽. 1권은 항상 조금 앞으로 튀어나오게. 그녀는 기형도의 시집을 제자리에 꽂고, 그 옆에 있는 김영태의 시집 ‘과꽃’을 꺼냈다. 시인의 육필시집(손으로 직접 쓴 시집)을 구했다고 엄청 좋아하던 기억이 났다. 책갈피는 126페이지에 꽂혀 있었다. 시집의 제목과 같은 시 ‘과꽃’이 보였다.



과꽃이 무슨

기억처럼 피어 있지

누구나 기억처럼 세상에

왔다가 가지

조금 울다 가버리지

옛날같이 언제나 옛날에는

빈 하늘 한 장이 높이 걸려 있지



몇 번이나 읽었던 시였지만, 계속해서 한 문구가 눈에 밟혔다. ‘누구나 기억처럼 세상에 / 왔다가 가지’ 평생을 쌓아온 기억을 잃는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남의 입을 통해서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는 이 세상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갑자기 들고 있던 시집이, 들이쉬는 공기가 무거워지고, 책장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힘겹게 책을 제자리에 꽂고, 눈을 감고 나서야 숨 쉬는 게 조금 편해졌다. 몇 번 더 심호흡을 하니 어지러움도 사라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책상 한가운데 놓인 하얀색 노트북이 보였다.


‘이걸 왜 이제야 본 거지?’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익숙한 모습의 책장과 시집들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까. 그녀는 노트북을 열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병실 문이 열리며 수아가 들어왔다.


“언니, 언제 일어났어요? 괜찮아요?”


“응. 괜찮아. 좀 전에 일어났어.”


“아까 얼마나 놀랐는데요. 여기가 병원이라서 다행이었지, 아니면 119 불렀을 거예요. 의사 선생님 말이 잠깐 기절한 것 같다고, 조금 자다가 일어날 거라고 했는데...”


“응. 괜찮아. 어디 아픈 데도 없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병원 왔다가 환자 한 명 입원시키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데 이건... 오빠 노트북이에요?”


“응... 봐도 되겠지?”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노트북의 주인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고, 수아는 그와 관련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오히려 수아가 되물었다.


“보고 싶어요?”


“응. 혹시 그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핑계야. 나는 왜 그를 찾으려고 하는 걸까? 이제는 뭐가 뭔지도 모르겠어.’


아까 할머니에게 들은 말들이 생각나며 그녀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럼에도 이 노트북 안에는 뭔가가 있을 것 같았다. 부팅이 끝난 컴퓨터 화면 위로 패스워드 창이 나타났다. 3년 전과 같을까? 아니면 바뀌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비밀번호를 하나씩 눌렀다. 그녀의 이름과 핸드폰 번호 뒷 4자리. 10자리의 문자를 입력하고 엔터키를 눌렀다.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바뀌며 짙은 파란색 바탕에 하얀 초승달이 떠 있는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비밀번호 알고 있었어요?”


“3년 전에. 다행히 바뀌지 않았네.”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로 만들어진 10자리의 비밀번호. 그는 왜 바꾸지 않았을까. 마음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바탕화면 위에는 내 컴퓨터, 내 문서, 익스플로러, 휴지통 등 흔하게 볼 수 있는 아이콘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하나의 문서 폴더가 눈에 띄었다. 커서를 움직여 폴더를 열자, 빼곡하게 날짜별로 정리된 동영상 파일들이 나타났다. 가장 오래된 파일은 2012년 7월 22일이었다. 그녀가 그와 헤어진 다음날. 그리고 수아가 그의 집으로 이사 온 그날. 그녀는 떨리는 손끝에 억지로 힘을 주어 동영상 파일을 열었다. 모니터 위로 아까 수아네 할머니가 입은 환자복과 색깔만 다른 옷을 입은, 바로 며칠 전에 (혹은 3년 전에) 봤던 것과 똑같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그 작은 얼굴 안에 잘 섞이지 않은 세상의 모든 감정을 담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폴더의 이름은 ‘기억’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그녀의 이별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