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주말이 지나갔다. 월요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면서 생각해보니 주말 내내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춘천에서 하루를 더 머무르며 병원을 통해 서울 관할 경찰서로 실종신고를 하고, 수아의 집에 남아있는 그의 물건을 챙겨 왔다. USB에 동영상을 담아와 하루 종일 다시 보고 (덕분에 몇몇 동영상에서는 그의 대사를 외울 정도가 되었고), 책장 구석에서 지난 다이어리를 꺼내 그와 있었던 추억들을 되짚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주말의 모든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았다. 수아네 할머니 말대로 이기적인 시간은 너무나 천천히 흘러갔고, 월요일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몸도 마음도 바빴지만 마음 깊은 곳 어딘가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저번 주 매일같이 내리던 비는 그쳤고 오랜만에 아침해가 떴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비가 그친 게 좋지만은 않았다.
“연아, 좋은 아침.”
“대리님, 주말 푹 쉬셨어요?”
“응. 덕분에 괜찮아졌어. 금요일에 별 일 없었지?”
괜찮다는 말은 거짓이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그를 걱정하고 있는 마음과, 그에게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었다는 마음에 괜찮지 않지만, 또 괜찮았다. 불안과 안도. 그녀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감정이 한 마음에 들어있는 기분을 그저 ‘괜찮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마찬가지의 대답을 하고 이달 말에 보고할 기획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주말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그리고 순식간에 지나갔다.
퇴근을 하고 나선 선릉에 갔다. 입장권을 끊고 흙길과 나무들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저번 주에 신나게 비를 맞았는지 나무들은 푸른 잎을 마음껏 자랑하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이 길을 걷던 때가 생각이 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의 침묵 사이로 스미는 풀벌레 소리를 노래 삼아 걸었던 밤. 그녀는 아무도 없는, 나무가 우거진 길 끝에 서서 정자각 위로 차오르는 달을 조금 보다가 다시 발길을 돌렸다.
다음날 아침에는 포스코 사거리 앞의 지하도에 갔다. 한때 그가 지하도 건너편의 회사를 다닐 때, 같이 출근하는 날이면 항상 여기에서 헤어졌었다. 이 지하도의 저 끝에서 먼저 올라가라며 손짓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무심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출근 시간에 쫓겨 계단을 올라갔다.
어느 주말에는 회사가 아니면 올 일이 없는 테헤란로를 걸었다. 주말에 출근한 그를 만나러 와서 가볍게 저녁을 먹고 천천히 걸으며 했던 이야기들. ‘이 길을 우리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걸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남겨져 있을까.’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마냥 좋았던 한적한 테헤란로의 주말 저녁이 떠올랐다.
가끔은 수아의 집에 놀러 갔다. 저녁을 같이 먹고, 집 주변을 산책하며 수다를 떨다가 결국에는 맥주를 몇 캔씩 들고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시험 준비하는데 방해되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수아는 그렇게 공부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았다. 수아는 춘천에 갔던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 사실이 참 고마웠다. 집에 돌아갈 때면 항상 바로 앞 공원에 들렀다. 벤치에 앉아서 그가 했던 말, 그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리다 누군가 지나갈 때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그녀는 문득 그가 이별을 말했던 그날을 떠올렸다.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서 보였던 차가운 말과 서늘한 표정을 지은 가면. 그때처럼 무섭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자, 보일 듯 말 듯 흔들리는 그의 눈빛에서 가면 너머의 진실이 보였다. 억지로 저런 표정을 짓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왜 그때는 알지 못했을까? 그녀의 마음 한편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마치 잠겨있지 않았지만 무서워서 열지 못했던 문을 활짝 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구나...’
웃고 있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왜 마지막 순간만 기억했을까? 이별의 순간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기만 해도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 이렇게 많았었는데.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까?
그렇게 4개월이 지나갔다.
“언니, 어디까지 왔어요?”
“응. 거의 다 왔어.”
“나 배고파 죽겠어요. 빨리 안 오면 케익 다 먹어버릴 거예요.”
“빨리 갈게. 그런데 지금 맥주랑 우산에 휴대폰까지 들고 있어서 통화하기 힘들어.”
“알았어요. 이따 봐요.”
점심 무렵 수아의 면접 합격 소식에 급하게 축하 파티를 잡았다. 파티라고 해봤자 수아의 집에서 케익과 술, 수다가 끝이겠지만 그녀는 몇 시간 전부터 자기 일인 것 마냥 계속 신이 났다. 그냥 몸만 오라는 말은 나중에 월급 받으면 사라는 말로 가볍게 무시하고, 맥주와 와인, 그리고 깜짝 선물까지 준비했다. 퇴근 바로 전에 비가 오는 바람에 길이 조금 미끄러웠지만, 그녀는 또각또각 빠른 걸음으로 면목역 1번 출구 옆길을 걸어갔다. 뿌옇게 흩어지는 가로등 불빛 너머로 투명한 비닐우산을 든 남자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아까부터 여기서 뭐 해요?”
“응. 누구 기다리고 있어.”
“누구 기다리는데요?”
“그게... 누구를 기다리는지를 모르겠네...”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걸음이 느려졌다. 부드럽고 차분한 느낌이 드는 중저음의 목소리, 새벽 1시쯤 라디오에서 나오면 딱 좋을, 계속 듣고 있으면 조용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저기...?”
원래는 흰색이었을 캔버스화를 신고, 청바지와 짙은 남색 패딩을 입은 그가 그녀를 마주 보았다.
fin.
짧게 쓰려고 시작한 글이 어느새 두 달을 훌쩍 넘겼습니다. 문장을 길게 쓰는 것은 처음이라 어려움이 많았었는데, 쓰다 보면 늘겠지 생각하며 그냥 열심히 썼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월요일부터는 '그'의 눈으로 본 '그녀의 이별' 속 숨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글을 써 내려갈수록 부족함을 절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인 '목소리를 들려주세요'는 더 짜임새 있는 글로 돌아오기 위해 지금까지 발행한 글을 취소했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죄송하고, 감사드립니다. 더 좋은 글로 돌아올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