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특집 단편

by 윤군

괜찮은 이별이었다. 어떻게 이별이 괜찮을 수 있냐고 하겠지만, 적어도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울거나 싸우지 않고, 날이 선 대화도 하지 않았으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했던, 흔히 말하는 쿨한 이별이었으니까. 헤어지고 나서도 드라마에서처럼 술에 취해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를 남긴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미친 듯이 사랑했기에, 후회나 미련 따위가 남지 않아서라고 모두들 이야기했다. 익숙한 것의 상실에 다시 익숙해지는 것은 당연히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며 그를 위로했다. 눈이 쌓이고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며 남자는 몇 년 전의 그날을 떠올렸다.



“잘 지내. 가끔 연락도 좀 하고.”


“그냥 서로 연락 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긴... 헤어지는 마당에 계속 연락하길 바라는 건 욕심이네.”


“...... 시간이 많이 지나면 그때 보자.”


“한 10년쯤?”


“글쎄... 우리가 만났던 날보다 헤어진 날이 더 많아질 때쯤?”


“...... 기약 없는 약속을 하자는 거구나?”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다니까.”


“그럼 이렇게 하자. 오늘처럼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저 트리 앞에서 보는 걸로.”



‘시간이라도 좀 정해놓을 걸 그랬나?’


어차피 다른 할 일도 없는 남자는 그때보다 더 화려해진 청계광장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대부분 커플이거나 아이가 있는 가족이었다. 가끔 트리를 배경으로 여자끼리 사진 찍는 무리도 있었고, 그보다 더 가끔 혼자 서있는 남자나 여자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사람과 손을 잡고 웃으며 사라졌다.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지나쳐갔다. 트리 앞을 서성대던 남자는 추위보다 어색함을 먼저 느꼈다. 남자는 교보문고에 가서 가장 두꺼운 인문서적을 사들고 청계광장 옆의 T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기억 못할 수도 있지. 혹시 기억한다 하더라도 굳이 나올 이유는 없으니까. 그래도 뭐, 이런 시간도 나쁘진 않네.’


따뜻한 카페라떼 한잔을 들고 크리스마스 트리가 잘 보이는 2층 창가에 앉아 책을 폈지만 책은 좀처럼 읽히지 않았다. 책 보다 창밖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아져 갔다.






흔치 않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인데도 도무지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한적한 골목길도 아닌데 불황 때문인지 아니면 저작권 때문인지 거리 위에 신나는 캐럴은 들리지 않았다.


‘옛날에는 정말 신났었는데.’


온갖 캐럴 송들이 울려 퍼졌던 언젠가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며 여자는 이어폰을 끼었다. 플레이리스트는 당연히 크리스마스 캐럴, 맨 첫 곡은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여자는 음악에 맞춰 손끝을 까딱거리며 길을 걸었다. 이제야 좀 크리스마스 같았다. 하지만 들뜬 기분은 10분을 넘기지 못했다.


“응, 오빠. 거의 다 왔어. 지금 광화문 쪽이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출근을 왜 해?”

“회사 일은 오빠 혼자만 해?”

“그럼 좀 미리 말해 주든가”

“얼마나 걸릴 거 같은데?”

“알았어. 근처에서 시간 때우고 있을 테니까 빨리 와.”


광화문 광장의 동상 위에는 소복하게 눈이 쌓이고 있었다. 여자는 제일 먼저 근처 빌딩에 붙어있는 글판을 찾았다.


두 번은 없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므로 너는 아름답다.


광화문에 자주 오지는 않지만 올 때마다 꼭 찾는 곳이었다. 이번 글판도 어김없이 좋았다. 여자는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바꿔 좀 걷기로 했다. 날은 추웠지만 걷는 게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내리는 눈을 조용히 맞고 싶었다.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덕수궁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어폰에는 조용한 피아노곡이 흘러나왔다.


눈 내리는 풍경과 사람들 구경을 하면서 조금 걷다 보니 길 건너편 청계광장에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보였다. 트리는 여자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화려했고, 기억에서와 마찬가지로 하얗게 눈이 쌓이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오늘처럼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저 트리 앞에서 보는 걸로.”



꿈결처럼 언젠가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앞으로 보지 말자고 돌려서 하는 말에 눈치 빠른 남자가 했던 대답. 무엇 때문에 헤어진 건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별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여자에게 몹시 아팠던 일이라서 일부러 잊었을 수도 있다. 조금 오랫동안 멈춰 서있던 탓인지 몸이 차가워졌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생각났다. 여자는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보려던 마음을 접은 채 길 건너편에 보이는 T 커피숍을 향했다.






1층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한가한 카페가 있다는 게 더 이상하겠지만, 그래도 한자리쯤은 비어있을 거라 생각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비어있는 자리를 찾는 여자의 눈에 창가에 앉아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여자는 왜인지 모르게 당황해하며 몸을 돌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지만 때마침 창밖을 보다 고개를 돌린 남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손을 흔드는 남자를 보고 여자는 작게 한숨을 쉬며 창가로 갔다.


테이블 주위에 다른 짐은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이에 책을 덮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혼자 온 거야?”


“아니, 조금 이따 약속 있어. 넌?”


“나도. 일찍 나와서 책 보고 있었지.”


남자가 내민 책은 방금 산 것처럼 깨끗했다. 책갈피는 꽤 앞쪽에 꽂혀 있었다.


“너도 금방 왔나 봐? 얼마 안 읽었네?”


“응. 좀 전에 왔어.”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두 사람은 이런 침묵도 충분히 즐거워했었지만 지금은 서로가 부담스러워했다. 이번에는 여자가 먼저 말했다.


“잘 지냈어?”


“뭐 똑같지. 회사 다니고. 아, 나 회사 옮겼어.”


“어디로?”


“그냥 좀 작은 회사. 일도 적고 퇴근도 빠른 그런 회사야.”


“좋네. 너 그때는 너무 바빴잖아.”


“그래서 옮겼지. 너는 잘 지냈어?”


“나도 뭐... 잠깐만.”


말하는 도중에 여자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액정에는 안경 낀 남자 얼굴이 나타났다.


“응. 오빠. 지금 끝났어? 근처 커피숍이야. 응. 바로 나갈게.”


“남자친구?”


“응. 아쉽지만 지금 나가야겠다.”


“빈말은. 얼른 가봐. 추운데 기다리게 하지 말고.”


빈말은 아니었다. 어색한 표정과는 달리 여자는 남자가 정말 반가웠고,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친구들은 잘 있는지, 아직도 취미로 기타를 배우는지, 여자친구는 어떤 사람인지.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기다리게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자에게 막 생각난 듯 남자가 말했다.


“아, 맞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여자가 가고 나서도 남자는 한참 동안 책을 읽었다. 창밖을 구경하는 것도 아닌데 책은 더디게 읽혔다. 날이 어두워지고 크리스마스 트리는 색색의 불빛으로 더 화려해졌다. 남자는 절반쯤 읽은 책을 덮었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크리스마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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