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春, 보다-)

by 윤군

"왜? 별로였어?"

"아냐, 괜찮았어."

"괜찮은데 밥만 먹고 헤어지냐?"

"괜찮은데 내 스타일은 아니어서."

"처음부터 내 스타일, 네 스타일이 어딨어? 만나다 보면 내 스타일이 되는 거지. 너 그러다가 평생 연애 못한다."

"아주 악담을 해라."

"그러니까 이것저것 재지 말고 일단 몇 번 더 만나..."

"야 나 버스 왔어. 나중에 통화하자."


남자는 급하게 전화를 끊고 뛰기 시작했다. 50m 앞 정류장에는 집으로 가는 버스가 사람들을 태우고 있었다. 마치 20살 때로 돌아간 것처럼 전력을 다해 뛰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남자는 심하게 헉헉대는 폐와 함께 정류장 벤치에 앉아 벌써 신호를 하나 지나고 있는 버스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운동을... 해야지... 죽을 것... 같네...'


문득 6개월을 끊어 놓고 일주일도 나가지 않은 피트니스 센터가 생각났다. 다시 운동을 해야겠다는 (아마도 내일이면 잊혀질) 다짐을 하며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콧등에 살짝 맺힌 땀은 찬바람에 이내 모습을 감췄다. 경칩이 지난 지 오래인데 봄은 아직 멀리 있는 것 같았다.


9번째 소개팅이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몇 번 해왔던 대로 토요일 저녁에 약속을 잡고, 조용한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조금 일찍 나와 근처 카페에서 여자를 기다렸다. 음식은 맛있었고, 한 시간 동안 이야기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그것뿐이었다.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남자는 맞은편에 앉 여자에게 끌리지 않았다.


끌린다는 것.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남자는 어떤 '끌림'을 원했다. 연애의 과정은 단순하게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진다'로 말할 수 있다. 그 단순화의 과정에서 결국 모든 연애는 똑같아지지 시작부터 평범한 만남은 싫었다. 로맨틱한 영화 혹은 막장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만남은 아니더라도 우연하지만 강렬한 어떤 만남. 남자는 우습게도 조금쯤 운명적인, 혹은 우연인 만남을 꿈꾸었다.


정류장 옆으로 화물 트럭 한 대가 지나갔다. 알싸한 매연 냄새가 코 끝에 남았다.




여자는 점심부터 조금 들떠있었다. 꽤 오랜만의 소개팅이었고, 주선자에게 받은 남자의 사진이나 알아본 장도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카톡을 주고받는 동안 한 번도 틀리지 않았던 맞춤법까지. 느낌이 괜찮았다. 30분가량 신경 써서 화장을 하고 머리에 웨이브를 살짝 넣었다. 거울을 보니 만족스러웠다.


약속은 6시였지만 5시쯤부터 교보문고 인문학 코너를 돌며 책 구경을 했다. 적당히 읽을만한 책 한 권을 사서 카페에 들어갔다. 6시 5분 전, 여자는 남자에게 카톡을 보냈다.


어디세요?

10분이 지났지 답은 오지 않았다.


저 광화문 근처에 있어요. 오시면 연락 주세요.

다시 30분이 지났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여자는 들떠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슬어 고철로 변하는 기분을 느끼며 감정을 꾹꾹 담아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미리 연락이라도 해 주시지요. 소개팅이 하기 싫거나 부담스러웠더라도 미리 연락했으면 하루를 마냥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았겠지요. 남은 하루 잘 보내시고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해요. 변명으로 들리시겠지만, 어제 사업부 회식에 감기몸살 때문에 쓰러져 있었어요. 저 때문에 주말 망치셨을까 봐 걱정되네요. 다른 의도로 피한 건 절대 아니니 기분 푸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답이 왔다.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답을 하지 않았다.


'봄부터 액땜한 걸로 치지 뭐.'


집에 들어가서 야식이나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카페를 나왔다. 정류장에 막 도착한 버스가 보였다. 가뜩이나 잘 오지 않는 버스인데,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조심조심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여자가 정류장까지 뛰는 동안 버스는 출발하지 않았고, 안심하는 순간 발이 꼬이며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팠다. 그리고 아픈 것보다 부끄러워서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괜찮으세요?"

"네네 괜찮아요."


모르는 남자의 말에 일단 대답은 했지만 부끄러워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길 건너편 빌딩에 글판이 눈에 들어왔다.


봄이 부서질까 봐

조심조심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정말 괜찮으세요?"


여자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서러웠다. 예쁘게 꾸미고 나와서 정작 소개받은 남자는 보지도 못하고 사람 많은 정류장 앞에 넘어진 모습이라니.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설움을 지니게 된 여자는 펑펑 소리 내며 울었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총을 한 눈에 받게 된 남자는 당황했다.


"아니.. 저기요. 지금 여기서 울면 제가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 되거든요. 그러니까 일단 진정하시고..."


남자의 말보다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고 일으켜 세우는 손길이 더 효과가 있었다. 오래지 않아 여자는 눈물을 그쳤다. 남자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쏟아지는 여자의 하소연에 아까보다 더 당황했다.


"제가요... 원래 오늘이 소개팅인데......"

'이 여자는 왜 초면인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할까?'


"...... 소개팅남이 연락도 없다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미안하다고만 했다니까요. 그런 똥매너가 어딨어요?"

"주선해준 친구한테 미안해서라도 그렇게는 못하는데.. 남자가 개념이 없네요."


우습게도 남자는 여자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다. 하소연이라고 하기에는 적절한 구성이 있었고, 이야기에 따라 변하는 여자의 표정에 적당히 긴장감이 실렸다. 직업이 작가나 구연동화 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서 갑자기 서러웠나 봐요. 죄송해요.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갑자기 정중해진 말이 낯설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서로 말은 없었다. 여자가 기다리는 버스가 먼저 왔다. 우연일까? 운명일까? 아니면 끌림일까. 일어서는 여자를 향해 남자가 말했다.


"저기..."

"네?"

"시간 괜찮으면 저랑 커피 한 잔 하실래요?"

"...... 커피는 말고... 혹시 저녁 드셨어요?"

"한 번 더 먹죠 뭐."


마주 본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달달한 꽃향기를 코 끝에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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