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의 날 선물

따라 쓰는 에세이

by 윤군

스물한 살이 되던 5월의 세 번째 월요일. 길에는 장미꽃 파는 사람들이 몰려나왔고, 화장품 가게 앞에는 비싸 보이는 향수들이 줄줄이 진열되었다. 인생에 한 번뿐인 성년의 날.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손을 잡고 걷는 커플들이 많아 보이기도 했다.


성년의 날 세 가지 선물이 장미꽃, 향수, 키스라던가? 하지만 그것들과 별 인연이 없었던 나와, 마찬가지의 친구들은 과선배의 야심 찬 프러포즈 계획에 고용되었다. 장미꽃과 촛불로 하트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고백을 하겠다는 선배의 계획. 수업이 끝나면 PC방 외에는 갈 곳이 없었기에 짜장면 한 그릇으로 흔쾌히 노동력을 제공했다.


꽃시장까지 가서 사 온 장미꽃 꽃잎을 하나씩 떼고, 동대문에서 사 온 작은 초 100개를 세팅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총 4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5월임에도 불구하고 26도까지 오른 낮 기온과 장미꽃 사이사이에 숨은 가시 때문이었다. 그렇게 선배의 프러포즈 준비는 무사히 끝났고 그제야 마르기 시작한 땀과 빨갛게 부풀어 오른 손끝에 우리는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졌다.


짜장면을 먹고 나자 역시나 할 일이 없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의 일상을 미루어 추측하자면, 아마 술을 먹고 PC방을 갔거나 PC방을 갔다 술을 먹었을 것이다. 술집과 PC방을 왕복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지나고 있었다. 핸드폰을 열어봤지만 부재중 전화 목록은 비어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1년이 지나니 통금시간은 없어진 지 오래고, 늦는다는 연락이 없어도 아빠는 그냥 늦는구나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은 건 순전히 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을 두고 밖으로 나오니 몇 시간 전만 해도 북적였던 거리가 조용했다. 낮과는 다르게 밤공기는 차가웠다. 덕분에 조금 남아있던 술기운이 저만치 달아났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택시를 잡고 집에 가는 동안 잠깐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집 근처였다.


문 앞에서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쯤이었다. ‘아마도 아빠는 거실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겠지.’ 2년 전부터 아빠는 꼭 안방이 아닌 거실에서 잤다. 혹시나 아빠를 깨울까 봐 도둑마냥 조용히 문을 열었다. 어쩐지 더 넓어 보이는 거실에 조금 전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 아빠가 자고 있었다. 뒤꿈치를 들고 고양이처럼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한번 뒤척였지만 잠에서 깨진 않았다.


방에 들어와서 옷을 벗는데 책상 위에 하얀색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영장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으로 봉투를 열었는데 뜻밖에도 싸구려 편지지와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이 나왔다. 편지에는 삐뚤어서 알아보기 힘든 글씨가 쓰여 있었다.


아들아, 성인이 된 걸 축하한다. 지금까지 잘 자라줘서 고맙고,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생각을 깊히 하고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내가 되었으면 좋겟다. 재작년 엄마 돌아가시고 많이 힘들지만 아빠가 더 노력할테니까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자꾸나. 사랑한다. 아빠가.


아빠에게 받은 첫 번째 편지였다. 읽기도 힘들고, 몇 군데 맞춤법도 틀렸지만 읽으면서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고맙고, 미안하고, 부끄럽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온갖 감정 뒤로 울음소리가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밤은 길었다. 살아왔던 중 손에 꼽을 만큼 긴 밤이었다. 나는 씻지도, 잠들지도 못하고 짧은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그 긴 밤을 보냈다. 아빠의 편지는 장미꽃, 향수, 키스에 비할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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