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눈썹달

by 윤군

며칠째 밤을 새운 날이었다. 어제 그제와 마찬가지로 아침부터 팀장에게 불려 갔다. 왜 이렇게 일이 늦냐는 내용뿐인, 어제와 비슷한 레퍼토리의 인신공격성 욕을 30분쯤 듣고서 자리로 돌아왔다. 요 며칠 동안 들은 욕으로 수명이 3년 정도 늘어났겠지. 한숨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책상 구석에는 빈 핫식스 캔들이 시체처럼 나란히 늘어서 있다. 하나, 둘, 셋...... 아홉 개. 남아있는, 그래서 미지근한 캔 하나를 딴다. 하루에 3개씩 마셨으니까 3일. 그리고 오늘이 4일 째다. 오늘 하루도 길겠지. 하지만 읽고 써야 할 보고서는 많았기에, 이 긴루도 모자랄 것이다.




6시가 되자마자 팀장은 퇴근 준비를 한다. 나가면서도 끝까지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오늘 내 책상에 자료 올려놓고 퇴근해.”


좋게 생각하자. 보고서 다 쓸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보다 낫지 않은가.


“나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서.. 도와주고 싶은데 미안해.”

“내가 같이 밤 새 줄게.”

“제 일인데요 뭐. 얼른 퇴근하세요.”


불고기버거 세트 하나를 사 왔다. 사무실은 또 텅 비어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라


누구에게 들었던 말이었지? 김과장? 정대리? 아... 맞다. 작년에 퇴사한 승대리.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었다.


‘일 빨리 끝내면 일찍 퇴근해서 쉴 것 같지? 안 그래. 일 다하고 좀 쉬고 있으면 다른 일 또 줄 걸? 어딜 가나 일 많은 사람, 야근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어. 그러니까 악착같이 빨리 하려고 하지 말고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내일 해.’


철없던 신입사원 때 사수였던 승대리가 했던 말.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이렇게 와 닿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이번 보고서만 끝나면 다음부턴 좀 미뤄보자 생각하며 햄버거와 핫식스를 입에 넣었다.




11시가 좀 넘어서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Ctrl+p, 그리고 엔터 한번. 119페이지의 보고서가 출력된다. 이제 숫자와 오탈자 확인만 하면 된다. 그래도 시간이 늦어차는 못 타겠지만. 빨간 펜을 들고 8페이지를 넘기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아들. 오늘도 집에 못 들어와? 요즘 회사가 그렇게 바빠? 저녁은 챙겨 먹었지?”


반쯤 잠이 든 아버지의 목소리에 괜히 마음이 울컥한다.


“아까 먹었지. 지금 퇴근해. 먼저 주무시고 계세요.”


시계를 보니 아슬아슬하지만 막차는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류 가방에 보고서를 넣고 사무실 불을 끄고 나왔다. 내일 좀 일찍 나오자. 자료 검토는 내일 출근길에 보면 된다. 오히려 지금 보는 것보다 내일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선릉역까지 뛰기 시작했다.


역 안에 들어서니 아래에서 지하철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서둘러 카드를 찍고 계단을 내려간다. 올라오는 사람이 몇몇 보였다. 계단 끝에 내려왔을 때, 누군가 팔을 치고 달려갔다. 가방이 멀리 날아가고, 열린 틈으로 내일 출근길에 봐야 할 보고서가 흩날렸다. 우습게도 아름답게 보이는 그 짧은 보고서들의 하얀 군무 뒤로 지하철 문이 닫혔다.




신은 회사에 다니라고 인간을 만든 것 같진 않아


이건 또 누구 말이었지? 책이었나? 바닥에 떨어진 자료를 주섬주섬 주웠다. 조금 뛰었다고 금세 지쳤다. 다시 올라갈 생각도 없이 벤치에 앉았다. 앞의 스크린도어 위에 시 한 줄이 쓰여 있다.


지친 하루를 돌아보니
위로받을 무언가가 있다


오늘 하루를 돌아봤다. 어제도, 그제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위로란 것도 사람을 가려서 오나보다. 지하철 운행이 종료되었으니 개찰구 밖으로 올라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벤치에서 그대로 잠들려고 한 마음을 숨기고 계단을 올라갔다.




“아저씨, 일어나세요. 여기 맞죠?”


택시를 탄 기억은 있는데, 어느새 집에 왔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정확히는 집 앞 인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집에서 한 정거장쯤 떨어진 곳이었다. 정신도 차릴 겸 조금 걷고 싶어 그냥 내렸다. 새벽이라 사람도 없고, 밤공기는 선선하고, 귀뚜라미 소리는 듣기 좋다. 뻗뻗하게 굳은 고개를 들었다. 얼마 만에 보는 하늘일까? 아주 오랜만에 올려다본 까만 하늘에 흰 눈썹 같은 달이 한 조각 걸려있었다.


“예쁘다.”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왔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행히 듣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을 서서 달과 하늘이 그려낸 그림을 본다. 까만 하늘 속에서 조금씩 별빛들도 눈을 뜨기 시작한다. 한숨이 나온다. 요 며칠과는 다른, 개운하고 시원한 한숨이다. 그리고 방금 눈 뜬 별빛 아래, 홀로 불 켜진 창문 하나. 아버지가 아직 안 주무시나 보다. 4일 만에 들어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걸까?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씻고 나와서 눈이 반쯤 감긴 아버지와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상한 팀장을 만나 고생이라느니, 좀 더 편한 회사로 옮기라는 이야기들. 방에 들어와 불을 끄고 누웠다. 까만 방에 형광등의 잔영이 남는다. 아까 본 달과 선릉역에서 본 시가 떠올랐다.


지친 하루를 돌아보니
위로받을 무언가가 있다


선선한 밤공기, 귀뚜라미 소리, 조금씩 눈을 뜨는 별빛과 밤하늘에 걸린 눈썹달. 그리고 아버지. 내게도 위로받을 그런 무언가가 있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 날의 일기예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