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조금 엉뚱한 곳에서 그를 만났다. 학교, 학원, 동아리, 동호회, 자주 가는 카페, 심지어 길을 가다가 헌팅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병원. 그것도 한의원. 그가 한의사인 것도 아니었다. 전날 무리한 요가로 삐끗한 허리 때문에 침을 맞으러 간 한의원에서, 할머니들 사이에 어딘가 웃기는 모습으로 앉아있던, (나중에 그의 말에 의하면) 여름이라 몸이 허해진 것 같다며 보약을 지으러 온 환자였다.
동네에선 유명한 한의원이었고, 덕분에 아침 일찍 갔음에도 (그녀보다 몇 시간은 더 일찍 일어났을 할머니들로 인해) 1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했다. 할머니들 사이에 낀 젊은 남자라 눈에 띄긴 했지만 옷을 깔끔하게 입은 것도 아니고, 잘생긴 얼굴도 아니었다. 큰 옷을 입은 건지 몸이 마른 건지 모를 헐렁한 티셔츠에, 지쳐 보이는 표정, 집 앞 이발소에서 대충 깎은 것 같은 헤어스타일.
‘거기에 뿔테 안경이라니.’
그녀는 그를 영화 속의 지나가는 엑스트라 4로 생각하기로 했다.
평소와 같은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도도하다고 했을) 모습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지만 대기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허리가 아파왔다. 심장소리에 맞춰 쿡쿡 찌르는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그 때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조금만 웃으면 훨씬 예쁠 것 같은데, 많이 아파요?”
부드럽고, 차분한 느낌이 드는 중저음의 목소리. 새벽 1시쯤 라디오에서 나오면 딱 좋을, 계속 듣고 있으면 조용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그래서인지 평소처럼 ‘그 쪽이랑 대화할 생각 없어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또 그래서인지 그가 했던 그 다음 이야기들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자신이 했던 말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구박할 때마다 그녀는 ‘목소리에 취해서’라고 핑계를 대곤 했다.)
멈췄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갑자기 빨리 가기 시작했다. 처음 그의 목소리를 들은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새 1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진찰실에 들어갈 차례가 되자 그는 급하게 자신의 폰 번호를 적어 줬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그쪽 번호를 받고 싶은데, 그러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나중에 연락주세요. 꼭!”
그는 ‘꼭!’을 몇 번이나 강조하며 말했다. 지쳐 보이는 표정과는 다르게 눈동자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웃기게도 그녀는 그 순간 그가 하는 말의 내용보다 그가 지닌 표정과 눈동자의 언밸런스함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활짝 웃으며 진찰실로 들어갔다.
‘웃으니까 훨씬 낫네.’
지나가는 엑스트라 4에서 대사있는 엑스트라 3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도 치료실로 들어갔다. 1시간 정도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자 허리의 통증이 훨씬 줄어들었다. 치료가 끝나고 나왔을 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번호까지 줬으면서 기다릴 생각은 없었나 보지?’
잠깐동안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친구를 만나고, 같이 저녁을 먹고, 평소와 같은 주말을 보냈다. 친구와의 수다 중에도 그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별로 재미있지도, 신기하지도 않은 일이었으니까.
일요일 밤에 라디오를 듣는데 문득 즐겨듣는 라디오 DJ의 목소리와 그의 목소리가 오버랩 됐다.
‘톤이 조금 낮았었나? 끝이 조금 더 길었던 것 같은데.’
대사있는 엑스트라 3에서 조연 2로 바뀌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시 조연 2에서 주연 1로 바뀌고, 4년을 만나고, 헤어졌다.
런던올림픽 개막을 며칠 앞두고 하루 종일 비가 내렸던 날. 2012년 7월 21일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