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를 좋아했던 그 친구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 대학교 동기와 이름이 같아서 실수로 전화를 한 번 걸었었다. 어디냐고 묻는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어디라고 대답하면서 웃던 너. 번호는 있었지만 우리는 전화를 할 정도로 친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너를 생각하면 발레와 항상 웃고 있던 눈과 입매가 떠오른다. 야자시간 틈틈이 발레 영상을 보던 너였다. 그 영상 속 발레리나처럼 너의 발은 걸을 때마다 바깥쪽을 향해 있었다. 그런데 너는 발레와는 아무 상관없는 학과에 진학했던 것 같다. 생명공학 쪽이었나? 아, 식품영양학이라고 했던가?
너는 알까, 나는 네가 참 부러웠다. 친구관계가 원만했던 것도, 공부를 잘하는 것도, 내가 들어가고 싶었던 동아리 회장인 것도 부러웠다. 부러움은 곧 열등감으로 변해서 너와는 친해지고 싶지가 않았다.
너를 다시 보게 된 건, 대학교 3학년 때 장례식장에서였다. 어린 나이였기에 당연히 사고사인 줄 알았지만 너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였다. 대학교 진학 이후 진로로 고민이 많았다는 말은 건너 건너 들었다. 그래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너는 항상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포기할 정도의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로서는, 너를 아는 사람들로서는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웃는 얼굴 말고 슬픈 얼굴을 한 너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너는 너 자신에게도 슬픔을 허락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너는 이제 나에게 한참 동생이 되었구나. 나는 이제 서른 살을 먹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네가 했던 진로 고민을 하고 있다. 너보다 몇 년을 더 살게 되며 느끼는 것은 매 순간 내 곁에 있어주는 게 참 힘들단 거다. 비록 너의 슬픔을 가늠할 수 없지만,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닌 게 되었다. 그래도 너는 너무 모질었다. 너에게도, 모두에게도.
오랫동안 만난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버림받은 나를 한동안 외면했다. 들을 수 있는 학점을 모두 채우고, 주중에는 학교 근로를 주말에는 카페 알바를 하루 종일 했었다. 학점관리도 하면서 모든 걸 해내야 했기에 정신이 없었다. 슬픈 걸 느낄 겨를이 없도록 나를 혹독하게 굴렸다. 학생치고 꽤 벌었던 돈으로는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슬프고 마음이 가난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항상 부족했던 기억만 남아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엔 약 4년간의 임용 공부로 지친 나를 오랫동안 방치했다. 그동안은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프로필 사진은 항상 파란 인간이었다. 프사를 할만한 사진을 찍은 적도, 사진을 찍을만한 좋은 곳을 간 적도 없었다. 무릎 늘어난 트레이닝복에 공부도 집에서 했다. 하늘을 보고 햇빛을 느낀 적이 참 적었다. 마음이 힘들 때는 나를 더 몰아붙였다. 내가 어디로 달려가는 건지 이 길이 맞는 건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두려웠던 건 아니었을까.
지금에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우습다. 헤어졌다면 청승맞은 이별 노래라도 들으며 눈물을 흘릴 걸. 친구들과 못하는 술이라도 마시면서 마음을 털어놔 볼걸. 나를 슬픔 속에 충분히 두었다면 슬픔은 흘러갔을 것이다. 나는 구태여 흐르는 것을 꾹꾹 막아냈다. 슬픔은 오랫동안 고여있었고, 몇 년이 지나서도 그 사람 생일이 되면 우울해졌다.
공부로 지친 나에게 나는 참 혹독했다. 전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길 원했다. 모든 경험과 기회를 차단했다.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친구관계도, 연애도, 즐거움도, 재미도. 그 경험이 있었다면 나는 조금 더 나답게 살았을 거다. 경험은 나를 알 수 있게 하니까. 그러나 나는 외딴섬처럼 고립되어 버렸다.
나를 쉽게 버린 결과는 우습게도 심한 무기력증이었다. 침대 위에 무력하게 몇 달을 누워 보내니까 나는 나를 더 이상 버릴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글을 쓰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방치한 마음들이 참 많았다. 너무 힘들다고, 그만 고통스럽게 해 달라는 마음들이 있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 모든 연료는 두려움이었다. 떨어질까 봐 혹은 버려질까 봐.
나를 보기 시작하자 더 이상 혼자 둘 수 없었다. 참 많이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짐했다. 매 순간 내 곁에 있기로. 슬플 때나 행복할 때나.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그런데 그게 절대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글을 써야지라고 마음먹은 순간, 갑자기 네 생각이 불쑥 나서 신기하다. 친구야, 잘 지내니? 사는 게 쉽지 않다는 네 생각에 동의한다. 그래도 그곳에서는 너도 네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 더 이상은 외롭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