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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조 Feb 14. 2023

엄마가 죽은 지 이주가 넘었다

나만 잘 먹고 행복했다.

3년 안에 대전에 누가 봐도 좋은 집을 사주겠노라 다짐하고 방 벽이며 다이어리며 써놨는데 올해 1월이 가기도 전에 엄마가 죽었다. 아직 60세도 되지 않았는데.


집에 가니 엄마는 이미 심정지 상태였다. 그 상태가 되기까지 엄마도 아빠도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을까.

무섭게 생긴 기계로 30분을 심폐소생 하니 간신히 다시 돌아오긴 했는데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시 멈췄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현실이 싫어 돌아오기 싫었던 것이다. 눈이 빛을 잃고 온몸에서 피가 났다.


의사가 가망이 없을 것 같다고, 지금 움찔움찔 움직이는 건 약물 때문이며 심장박동도 의미 없는 신호들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포기가 안 됐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심폐소생 1시간 후 엄마는 결국 사망선고를 받았다.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면 엉엉 울곤 하는데 현실에선 감각이란 게, 개념이란 게 사라져 오히려 더 멍하기만 했다. 엄마가 죽었다는 생각보다는 '이렇게 많이 아파서 불쌍해서 어떻게 해' 하는 마음이 더 들었던 것 같다.


할머니가 워낙 꿈에 자주 나오시긴 하지만 이날은 뭔가 달랐다. 할머니랑 꿈에서 어딜 가고 대화를 하고 시간을 보낸 게 아니라, 새벽 3시에 갑자기 깨서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느꼈을 고독과 공포가 갑자기 휩쓸려 와 혼자서 덜덜 떨며 펑펑 울고는 아침 10시가 넘어서까지 전혀 자지 못했다. 그리고 밤에 이 일이 일어난 것이다.

큰고모가 돌아가실 땐,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알바를 시켜달라고,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나는 할머니가 우리 집에 있는 게 좋으니까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옷이랑 양말이랑 예쁜 거 사줘야지, 맨날 맛있는 거 먹여줘야지 생각한 꿈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너무 좋아서 살아 계실 땐 하루에 두세 번씩 꼭 전화하고, 대학 때는 너무 보고 싶어 왕복 10시간을 버스 타고 가 정말 5분 얼굴만 보고 온 적도 있는데 그렇게 애틋해서 꼭 무슨 일이 있을 때 미리 나와 알려주는 걸까.


엄마는, 내가 딸인데, 딸 돈 쓰는 게 뭐가 미안하다고 내가 내 준 병원비를 굳이 굳이 갚고, 돈 빌려준 사람들이 다 핑계 대고 떼먹어서 외삼촌이랑 나한테 빌려달란 말을 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까.

내 결혼 당연히 내 돈으로 해야지 키워준 게 얼만데 결혼시켜 줄 돈이 없다고 얼마나 미안해했을까.

엄마 돈을 빌리고 갚지 않은 사람이 100명 정도 된다. 몇 억이다. 아무렇지 않게 돈 좀 넣어달라 말한다. 엄마는 계속 다 받아주고 속고 속아도 또 빌려줬다. 마음이 너무 약해 쳐내질 못한다. 아빠도 사기를 너무 많이 당했다. 지금까지 썼던 엄마 핸드폰들을 보면서 너무 화가 나고 가슴이 찢어졌다. 그들이 전부 아주 나쁘게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들을 견디며 그 예쁜 얼굴이 살이 쪽쪽 빠지고 치아도 다 흔들려 뽑고 틀니까지 했을 때 얼마나 속상했을까. 나는 엄마가 틀니를 한 것도 장례가 끝나고서야 알았다. 어쩐지 얼굴에 살이 빠진 건지 얼굴형이 갑자기 바뀌어 물어볼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괜히 엄마가 더 스트레스받을까 말을 못 꺼냈다.

아빠한테 왜 말을 안 했냐고, 임플란트 하면 되지, 그 정도는 내가 해줄 수 있다니까 미안해서 못 했다고...


응급실에서 의사가 엄마 피검사한 수치들을 보더니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수치라고 했다. 사망할 가능성이 있는 수치보다도 이미 훨씬 높다고 했다.

어떻게 흰쌀밥도 현미밥도, 채소도 과일도, 고기도 생선도 먹으면 안 되는 상황까지 됐을까. 엄청 아팠을 텐데 티 안 내느라 너무 힘들었겠다.

맨날 술 마시지 말라고 화만 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술을 안 마시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마신 것이다. 도저히, 도저히 안 마시고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에 병원에서 정말 한 잔만 마셔도 죽을 거라는 말에 제발 먹지 말라고 치료나 좀 받자고 했었는데, 수혈도 몸이 약해 제대로 못 받았고 엄마는 그때도 내가 병원비를 내준다고 미안해했다.


설에 같이 밥 먹은 게 마지막. 25일에 은행 가기 귀찮다고 보험료 내달라고 한 게 마지막 대화.

올해 생일선물로 해 준 구찌 목도리는 두어 번 밖에 못 둘러봤고, 옛날에 사 준 프라다 가방도 아낀다고 들고 다니지도 않았고, 싼 크림 하나 사달라는 걸 설화수로 다 바꿔줬는데 십 분의 일도 채 못 썼다. 아무리 좋은 옷, 좋은 가방 사줘도 왜 그렇게 싸구려 미운 것들만 입고 들고 다녔을까. 그렇게 예쁜데 왜 그렇게...


죽음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더 슬프고 덜 슬프고 가 아니라 그냥 축적만 될 뿐이다. 2009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아직 힘들고 하루도 생각 안 해 본 적이 없는데, 우리 강아지들도 그렇고 엄마까지 쌓이고 쌓일 뿐 전혀 괜찮아지지는 않는 것 같다.

사랑하는 모든 걸 잃는 과정이 인생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감당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어떤 상황이든 죽은 사람이 제일 불쌍한 건 맞다. 마음이든 몸이든 정말 죽을 만큼 너무너무 아팠던 거니까.


어릴 때부터 달님에게 종종 소원을 빈다. 엄마가 죽은 지 딱 일주일째 되는 날에는 보름달이 떠서 빌었다.

겁 많은 우리 엄마 가는 길 무섭지 않게 밝게 좀 꼭 비춰주시고,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어떤 죄가 있더라도 내가 정말로 진심으로 다 받을 테니 좋은 곳에서 꼭 안 아프게 좀 해달라고. 맨날 소원만 빌어 죄송하지만 다른 소원은 다 괜찮고, 아빠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 테니 이번 소원만은 꼭 좀 들어달라고.


23년 1월 29일.

인생에서 가장 잊고 싶은 날이지만 점점 더 또렷해지는 날이며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날.


현재는 빚더미에 앉았다.

사망신고를 하며 안심상속 서비스 신청을 했는데, 재산도 없지만 한국대부금융협회에서도 기록이 없다고 해 그냥 그것만 믿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알아보니 대부업체가 협회에 등록을 안 해놓으면 조회가 안 되고, 나는 핸드폰 해지며 공과금 납부며 보험이나 계좌 해지며 이주동안 바쁘게 다 처리했는데 그게 자동으로 상속을 받겠다고 하는 게 됐으며 빚이 있는 걸 몰랐어도 되돌릴 순 없다고 한다. 10원도 안 썼지만 안된다. 상속포기를 할 수 없다. 한다고 해도, 엄마 친동생인 외삼촌에게 빚이 가고, 외삼촌이 또 포기를 하면 사촌인 큰외삼촌한테까지 간단다. 그래서 한정승인을 하는 방법밖에 없어 오늘 급히 변호사 사무실에 다녀왔다.


대부업체는 다른 회사와 합병을 해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담당자에게 전화해 거래 내역 조회가 안 되는데 빚이 얼마나 있냐 물어봤더니 왜 묻냐며, 금액이 적으면 갚고 많으면 안 갚을 생각이냐며 빈정댔다. 정말 상종 못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빚은 엄마가 쓴 게 아니고 둘째 고모에게 부탁을 받고 둘째 고모 아들 차를 살 때 보증을 선 것이다. 그런데 고모부가 파산신청을 했고 엄마에게 그 빚이 다 온 것이다. 원래는 450만 원 정도라고 하는데 계속 연체되어 3000만 원이 넘게 되었다. 아빠랑은 내가 고등학교 때 이혼을 했었고 지금도 법적으로는 이혼상태라 이제 그게 다 나한테 왔다. 또 다른 빚이 있는지 없는지도 지금은 모르는 상태고... 그래서 엄마 명의로 된 아빠가 있는 집과 차, 보험 해지 환급금 등을 다 압류당할 예정이다.


얼른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아직도 너무 혼란스럽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엄마가 정말 너무 고생했다. 왜 살고 싶지 않았는지, 왜 그렇게 술과 약을 먹고 손목을 긋고 힘들어했었는지 하루하루 지날수록 뼈저리게 느낀다.

나도 솔직히 여러 가지 일들로 너무 지쳤다. 그렇게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사는 동안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고 해도 힘든 일들이 계속 생겨 감당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죽고 싶고 죽을 것 같아도 또 버텨야지. 내가 없으면 슬퍼할 사람들이 있다. 죽을힘을 다해 힘을 내야 할 책임이 있다.

무너지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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