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그걸 왜 당해. 모르는 번호는 애초에 안받으면 되지. 소연이는는 이렇게 말하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 사고를 하는 사람. 누구보다 꼼꼼하고 남에게 쉽게 안속았다. 그런데도 그날, 몇분만에 마음의 문이 열리고 말았다.
'송소연씨 되시나요? 서울중앙지법 행정과 손승기 사무관입니다. 지금 법원에 사건이 접수되서 출석 해주셔야 될것 같습니다.'
사무관이라는 사람은 즉시 인터넷접속 후 사건조회를 할수 있다고 재촉했다. 그때 지인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 결혼후 남편과의 관계에서 갈등, 일로 얽힌 문제로 내용증명까지 오가는 상황. 그 사건이랑 연관된 접수라는 생각과 불안, 순식간에 사이트에 접속했고 돈은 빠져나갔다. 보이스피싱이었다는걸 알게된건 찰나였다. 하지만 이미 사기를 당한뒤였다. 소연이는 돈을 잃은 슬픔보다 사기를 당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의심했을 전화, 절대 클릭하지 않았을 링크. 그 모든것이 순식간에 발생한것을 인정하지 못해 괴로워했다. 소연이를 아프게 한건 사라진 돈이 아니라 끝없는 자책이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판단력이 흐려지는 순간이 찾아올수 있다. 무언가에 홀리듯 자신을 지킬 힘이 고갈될때, 그럴때 자신이 한 선택을 후회한다. 후회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비난까지 이어진다. 나는 소연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연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악의를 가진 인간이 네가 약해졌던 순간을 노린거야. 너는 그때 너무 지쳐있었어. 그래서 그랬던거야. 사람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판단이 흐려지기 마련이야. 네 몸과 마음을 돌보는 시간이 필요했던거야. 사고나지 않고 몸이 건강하니 다행이고 감사하다고 생각을 바꿔보렴. 소연이에게 이렇게 말해줬지만 생각을 바꾼다는건 쉽지않은 일이다. 감정의 기억은 강렬하기 때문이다.
보이스피싱은 단순한 금융사기가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일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빼앗긴 건 돈이 아니라, 내면에 대한 신뢰다. 하지만 그 신뢰는 충분히 다시 세워질 수 있다.
“그때의 나는 너무 힘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회복은 시작된다. 회복은 거창한 일이 아니다. 불안과 자책으로 흐려졌던 시선. 잘못된 시선을 바로잡으면 된다. 지금, 살아 있는 나에게 돌리는것에서 시작된다. 숨쉬고 있고, 몸이 움직이고, 내가 하루를 살아낸다는 사실. 이날 이때까지 살아왔다는 사실.
그 소소한 일상은 나를 지탱해온 증거다. 그 자체로 잃어버린 신뢰를 다시 쌓아가는 기반이 된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서게 되는 것도 아니다.
작지만 단단한 일상들을 하나씩 되찾을 때 마음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지인이 그렇듯, 우리의 마음은 언제든 다시 단단해질 수 있다.
사기꾼들이 노린 것은 우리의 틈이다. 그 틈은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일어서는 힘은 그 누구도 훔쳐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