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드럼세탁기가 돌아가다가 갑자기 멈췄다. 화면에 E2라는 낯선 글자가 깜빡였다. 대우전자에 전화를 걸었다. 방문기사님이 와주셨고 이리저리 세탁기를 분해 해보더니 모터가 나갔다고 했다. 몇일전 물때제거한다고 전용세제를 넣었다. 거름망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며 부직포처럼 생긴 오염제거 종이를 넣었다. 근데 그게 화근이 되었던것이었다. 기사님께서는 통돌이 세탁기에는 넣어도 되지만 드럼세탁기는 배수구로 빠지는 방식이라 넣으면 안된다고 하셨다. 예전 같았으면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올라왔을 것이다.
'내가 왜 그걸 넣어서…왜 확인을 안 해서…실수했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자동처럼 올라오는 자책 회로.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았는데 가장 먼저 쏘아 붙였던 감정들.
이번에는 달랐다.그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고장 났구나'
그리고 A/S를 불렀다.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 이렇게도 고장이 나는구나'
몸에 닿는 기계인 만큼 더 잘 관리하도록 알려주는 신호였겠지. 128,000원이라는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겼지만 모터를 즉시 교체했다. 세탁기는 다시 부드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출이 아니라 배움의 비용이었다.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사님이 물때도통을 다 꺼내서 청소하는게 좋다고 말했다.
며칠 전 전용세제를 붓고 돌렸는데 겉보기엔 깨끗해 보였지만 드럼 내부 깊숙한 곳까지는 닿지 않았을것 같았다. 이왕 하는 김에 물때청소까지 맡겼다.
'내 몸에 닿는 옷을 빨래하는 기계인데, 더 깨끗해지는 게 나한테 이득이지.'
결과적으로 더 깨끗한 환경을 갖게 되었고 청소를 맡긴 나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매일 샤워 후 욕실을 닦아둔다. 욕실은 늘 바짝 말라 있다. 기사님이 세탁기 안에 고여 있던 물을 빼냈다. 그물을 바닥에 쏟아버렸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님은 바게스를 조심스레 들어 욕실 안으로 가져가 변기에 물을 버려주었다.
그 행동 하나에 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느껴졌다.
문제가 생기면 자책하는것도 내탓이 아니었다. 리스크를 싫어하는 나를 보호하는 미숙한 사랑방식이었던것이다. 이번 일을 통해 한 가지를 더 배웠다. 실수 또한 그 경험은 나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가는 신호로 삼을 수 있다는 것. 실수가 생기거나 상황이 틀어지면 자신을 탓했던적 있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덕분에 더 나아질 수 있었잖아. 또 하나 배웠어.'
세탁기 고장은 그냥 고장이 아니었다. 내 삶의 새로운 태도를 확인한 작은 사건이었다.
문제는 나를 혼내러 오는 게 아니라 나를 배우게 하러 온다. 그리고 배움의 기회를 통해 더 단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