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가 불안을 만드는걸까. 불안이 큰 사람이 완벽주의자가 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고르려고 한다. 이둘은 서로를 붙잡아 더 강하게 만드는 관계다. 불안하면 더 완벽하려 한다. 완벽하려고 애쓰다보면 더 불안해진다. 이 악순환은 누구나 한 번쯤 빠져본 적 있을 것이다. 나역시 마찬가지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문장을 읽는 사람이 뭐라고 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스친다.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잘해야 한다는 기준이 올라가면 마음의 자유는 줄어든다는 걸.그래도 우리는 자꾸 기준을 높인다. 실수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누군가 실망할 것 같아서.나조차 나를 못 믿을 것 같아서.
지난주 일요일. 느긋하게 아침루틴실행후 시간이 빠르게 흘러버렸다. 오전 9시 40분, 예배 시작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아슬아슬했다. 벧엘교회는 정시가 되면 대강당 문이 닫히기 때문이다. 콜택시를 불렀다. 늦으면 밖에서 VTR로 예배드릴 수도 있다. 하지만 늘 대강당 안에서 앉던 자리에 앉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였다. 도착해 보니 대강당 통로는 막혀 있었다. 안내받은 좌석도 평소와 달랐다. 낯선 자리와 어색한 동선 앞. 기대와 달라서 마음은 잠시 불편했다. 그 낯설음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대로 가지 않아도 괜찮네.새로운 자리에서도 편안하네.생각보다 뷰도 더 좋잖아. 다음에는 다른 자리에도 한번 앉아볼까.’
기준을 낮춘 건 아니었다.늘 하던 방식만을 고집하던 마음. 집착을 조금 내려놓았을 뿐이다. 그러자 불안이 통제하던 자리가 조금은 비어 있었다.우리가 힘든 이유는 기준이 높아서가 아니라,그 기준을 지키지 못하면 불편해서다. 문제 있다고 단정해버리는 마음 때문이다.
불안이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불안을 대하는 방식이다. 불안은 그저 '조심해, 너를 지키고 싶어'라고 말하는 몸의 신호일 뿐이다. 그 신호를 우리가 '이건 실패의 예고야'라고 해석해버리는 순간. 불안은 우리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완벽주의는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불안을 없애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불안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불안을 과장해 해석하는 마음. 그 습관을 바꾸는 것이다.
완벽을 추구하면 안심될 것 같았다. 하지만 또 다른 불안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엔 잘했지만 다음에도 잘할 수 있을까?’ 끝없는 불안의 재생산.
하지만 불안이 올라오는 그 순간. 멈출 수 있다면, 우린 완벽주의 고리를 조금씩 끊을 수 있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삶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부터 나답게 온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