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
더하기 둘
‘시마이~’
라는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면 (일제강점기를 겪은 세대들은 일상에서 일본어를 흔하게 사용하곤 했었다), 다 같이 탁자들을 한쪽에 겹쳐서 쌓아두고 이부자리를 나란히 펴서 온 가족이 한 방에 누워 잘 준비를 했다. 요에 누우면 양철 판자를 덧대어 보수하곤 했던 천장이 늘 조금씩 내려앉는 게 보였는데, 겹겹이 덧대어진 판자 틈 사이로 쥐들이 우다다하는 소리가 밤새 들렸다. 나는 언제 쥐오줌으로 누레진 천장을 뚫고 쥐가 떨어질지 몰라 마음을 졸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곤 했다. 그렇게 간신히 잠들다가도 사흘이 멀다 하고 어린 나조차 깨우게 만드는 한밤중의 난리가 이어졌다.
옆집에도 뒤쪽으로 이어 붙여 만든 쪽방이 있었는데 그 방에는 엄마, 아빠, 그리고 남매까지 모두 비쩍 마른 북어같이 생긴 성호네 가족이 세 들어있었다. 평소에는 말이 없던 그 집 아저씨는 술만 마시면 유독 아들만 죽어라고 두들겨 팼다. 아줌마가 말리면 더 때리기 때문에 아저씨가 지쳐서 잠들 때까지 성호는 그저 맞고 있어야만 했다. 아저씨의 욕지거리와 부서지고 때리는 소리, 자지러지는 성호의 높고 가는 울음소리는 성호가 아버지보다 더 키가 커지게 된 사춘기까지 이어졌다.
늘 어둡던 성호 누나는 어느새 집을 나갔고 (어쩌면 때 이른 결혼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저씨의 무능함과 음주, 폭력에도 곁을 지키던 아줌마는 우리 집 일을 돕게 되었고, 아버지보다 부쩍 커진 성호는 배가 부른 여자아이를 데리고 들어와 우리가 나중에 새로 지은 집 지하방에 살림을 차렸다. 성호와는 말 한번 제대로 안 섞어 봤지만 아기를 안고 있는 제법 참하게 생긴 그 애의 색시와는 가끔 인사와 근황을 나누곤 했다.
막연한 예감대로 어느 날 그 색시는 아기를 남겨두고 떠났고, 성호네는 새 직장을 따라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
방귀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로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우리 집, 옆집, 우리 집 뒷방, 옆집 뒷방까지 네 가구 총 스무 명 남짓이 그렇게 여러 해를 살았는데도,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느낌보다는 각자의 생존만이 절박한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네 개의 뗏목 같았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운 좋게도 우리 뗏목이 먼저 섬에 다다를 수 있었다는 점만 다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