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좋은 공간에 대하여 #1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최근의 경험이기도 하다. 휴가날짜가 겹친 둘째 딸과 강릉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내비게이션에 집을 목적지로 세팅한 후 1킬로 정도 지났을 때였다. 계획에는 분명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하지 못했던 바닷가 소나무 숲 아래의 느긋한 독서에 대한 아쉬움을 서로 토로하다가 충동적으로 핸들의 방향을 틀게 되었다. 아직 휴가날짜는 남아있고 지금은 평일이니 바닷가도 한적할 테고 밤에 운전하면 고속도로도 막히지 않을 테니 핸들을 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짐 정리를 완벽하게 한 상태이니 바다에 풍덩 뛰어 들어가고픈 욕구만 자제하기로 약속하고.
해수욕장을 조금 지나쳐 인적이 없는 바닷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가할 때라 주차할 곳도 넉넉했다. 트렁크에서 매트용 담요를 꺼내고 책과 물병만 챙겨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휴가 첫날의 호된 경험으로 모기퇴치용 스프레이를 미리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었다.
작년 괌 여행에서 반했던 리티디안 비치의 프라이빗 공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우리만의 호젓한 공간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니. 담요를 깔고 물병과 책을 놓고 일단 사진부터 공들여 찍는다. 소중한 순간을 영원히 담아두고 싶은 욕망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고 나서야 매트 위에 등을 대고 눕는다. 예년과 다른 긴 장마의 끝이라 그다지 덥지 않고 소나무 아래의 그늘은 우리에게 딱 필요한 만큼만 남겨두고 모든 햇빛을 막아준다. 발끝 너머에 펼쳐진 오후의 바다는 맑은 옥빛과 잔잔한 파도소리를 전해오고 있다. 둘째는 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나는 다음날까지 읽어야 하는 책을 펼쳐 들었다. 첫 페이지부터 흥미로운 매력으로 나를 이끄는 책이었지만 논제들이 만만치 않아서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다시 문장을 이어나가기가 힘들었다. 며칠째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다시 덮고 펼치기만 반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는 규칙적인 파도소리에 홀리듯이 잠 속으로, 나는 책 속의 문장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문득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바다 끝이 오렌지 빛깔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들어간 굴속에서 함께 모험을 끝내고 돌아온 느낌이었다. 느닷없는 현실세계에 아직 마법에서 풀리지 않은 채로 얼떨떨하게 서 있는 기분. 우리는 짐을 정리하고 바닷가를 잠시 거닐었다. 조금이라도 잔상을 붙들어 두고 싶은 마음과 아쉬움을 달래면서.
동시에 집중해서 책을 다 읽어냈다는 개운함으로 다시 집을 향해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