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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공일북클럽 May 02. 2016

따로국밥이지만 맛은 좋다

우리 가족의 세계여행법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70년 대,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자전거를 타고 대문 밖을 기점으로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까지 다녀오곤 했습니다. 바람과 햇볕 탓에 거칠어진 두 뺨과 주근깨 가득한 얼굴의 선머슴아 같던 내 어린시절, 바로 그때가 시작인 것 같네요.


그 다음은, 해외여행은 그저 꿈만 꿀 수 있었던 80년대 초반, 단발머리에 흰 블라우스와 검정 플레어스커트를 입은 수다스런여중생들로 가득한 교실 한 켠에서 단짝친구와 진지하게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비밀 탐험 노트를 만들었던 때로 이어지고요. 


종종 시위로 인해 매캐한 최루탄 가스로 뒤덮였던 대학시절이 끝날 무렵 민주화와 함께 해외여행 자율화도 이루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나는 꿈꿔오던 모습 그대로 배낭을 메고 런던 히드로공항에 내리게 되었죠. 초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스름 속 서늘한 공기가 나의 떨리는 가슴 속을 관통해 들어왔던 그 느낌이 아직도잊혀지질 않네요. 그 당시 막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보며 앞으로의 내 인생에도 어떤 장벽 없이 가슴벅찬 자유만이 가득할 거라는 순진한 환상을 품기도 했습니다.  

1990년 6월, 배낭을 메고 바티칸을 구경했던 친구 윤희와 나


많은 것이 벅차올랐던 두 달의 배낭여행 이후 저는 곧 결혼을 했고 두 딸아이를 차례로 낳고 기르면서 혼자가 아닌가족 세계여행이라는 또 다른 꿈을 꾸게 됐습니다.


하지만 꼭 외부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내 스스로 쌓은 장벽의 두께는 나날이 커져만 갔습니다. 남들 사는 것 만큼의 희로애락으로 쌓여진 시간들은 어느새 흘러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고, 전 포기할 수 없는 게 너무도 많아진 중년이 되어버렸죠. 그나마꿈으로 이어지는 끈을 놓고 있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랄까요.


그러다 엄마의 꿈이 오랜 시간에 걸쳐 한 방울씩 아이들에게 스며들었는지, 포기할게 가장 적었던 큰 아이가 먼저 세계여행을 떠났습니다. 점점 까매져가는 얼굴과 커다란 배낭을 거뜬히둘러멜 만큼 맷집도 튼튼해진 모습을 이국적인 배경에 담아 SNS에 올리는 사진과 글들을 보면서 남겨진우리도 함께 설레이곤 했죠. 그 사이 입시생인 작은 아이도 엄마의 강제(?)로 대학은 잠시 미루고 언니의 뒤를 이어 세계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아이가 각각 다른 대륙에서 각자의 여행을 하면서 소식을 주고 받는 동안, 우리 부부의 생각도 차츰 바뀌어 가는 걸 느꼈습니다. 절대로 포기할수 없다고 생각한 것들을 포기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우리 앞에 놓여진 장벽들이 하나씩 허물어져 가더라고요.


2014년 2월 남미에서 큰 아이 해인


아이들이 자연스러운 ‘여행자’의모습으로 바뀌어가는 동안 ‘집안의 가장’이라는 역할만 할줄 알았던 아빠도 드디어 배낭을 꾸리게 되었고, 이어서 저도 과감히 한 발을 내딛었습니다. 


큰 아이가 유럽에서 여정을 걷는 동안, 우리 부부는 서툰 폼으로 배낭을 꾸려 8달 째 혼자 남미를 여행 중 이던 작은 아이를 페루 리마에서 만나 함께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여행하고.. 다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상파울루, LA, 서울로 각자 다른 곳을 향해 떠나고.. 이후 두 아이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잠시 함께 여행하기도 하다가 큰 아이는 다시 남미로, 작은 아이는 유럽으로 각자의 여행을 이어가고.. 마침내 큰 아이가가장 먼저 여행을 시작한 지 만 2년 6개월이 되어서야 지금 우리는 서울에서 넷이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물리적으로 넷이 함께 하지 않은 여행이라서 더 좋습니다. 성인이된 아이들과 부모가 ‘부모’와 ‘자식’이라는 역할을 떠나지 못한 채 여행을 했더라면 지금처럼 달라진, 조금은 특별한 가족의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요.


서로의 여행을 그저 단단한 응원의 눈으로 바라보다가 잠시 만나 함께 하기도 하고, 혼자가 주는 외로움과 함께 여행할 때 각자의 가치관이 부딪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끔은 따뜻하게 서로를 안아줄 수 있는 이런 따로국밥 같은 우리의 여행이 나는 참 좋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여행은 계속되리라 예감됩니다. 우린 그렇게 판도라의상자를 열어버렸거든요. 모두가 달리기에 우리도 안간힘을 쓰고 달렸던 트랙에서 멈추고 내려서니, 천천히 걸어도, 걷다가 때론 멈춰서 뒤를 돌아봐도 우리의 등을 떠밀지않는 넓은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네요. 


그곳에서 우린 각자 나만의 길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곧 다가올 다음 여행도 멋진 여행이 될 거라 기대하면서요.


2015년 10월, 각자 다른 곳에서 와 남미에서 뭉친 세 사람. 아빠, 작은 아이, 엄마. 볼리비아 따리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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