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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Mar 22. 2023

단둘이 떠난 소풍

엄마 손을 놓지 않으리

   소풍을 가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쾌청했다. 준비해 둔 여행가방에 엄마가 좋아하는 카스텔라와 오렌지 주스를 넣었다. 김밥 없는 소풍, 기간도 정해지지 않아 은근히 두려웠지만 막연한 설렘 덤으로 따라왔다. 사나흘쯤 걸릴까? 혹시 예기치 않게 일주일을 훌쩍 넘길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조바심 대신 느긋한 마음으로 순리에 맡기려 한다.


구순 연세에 심장질환은 있지만 비교적 건강하던 엄마가 며칠 전, 발걸음을 못 떼고 땅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정기 검진을 며칠 앞둔 시점이라 응급으로 입원을 서둘렀다. 병실 배정을 받고 나서 심장주치의는 셀 수도 없는 각종 검사 종목을 길게 나열했다.


간호사들이 드나들며 수시로 피를 뽑아내고, 소변을 받아갔다. 심장 조영술을 위해 굵은 바늘을 꽂았던 손목에서 이내 붉은 피가 솟구쳤다. 지압을 너무 세게 했던지 검버섯 핀 손등 위로 푸르뎅뎅한 핏줄들이 툭툭 불거졌다. 각종 기계와 연결된 링거 주머니가 순식간에 주렁주렁 엄마 몸에 달렸다. 멀쩡하던 몸에 떡허니 중환자 딱지가 붙어버린 지금의 상황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나는 보호자로서 코로나 음성 확인을 거쳐 간병 자격을 얻었기에 엄마와 동행할 수 있었다. 링거를 맞자 가쁜 숨결이 한결 차분해지는 걸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절대 금식'이라 내가 준비해 온 간식 보따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녀지간에 이야기보따리만 술술 풀어내기 시작했다.


엄마가 들려주는 시대를 넘나드는 옛이야기는 왜 그리 흥미로운지 정신을 몰입하게 만든다. 처음 듣는 것도 아난데 간간이 추임새지 나올 정도로 점점 빨려는 게 신기 따름이다. 이야기가 중간에 잠시 끊어질 때마다 실마리를 풀 듯 장난스레 말을 툭툭 잇는 재미 쏠쏠하다.


“그래서 엄마가 언제 서울로 왔다고?”

“산수리에서 계속 살다가 아버지가 취직이 돼서 왔지. “


혼할 당시에 아버지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고 있었 엄마는 그대로 친정에 머물렀다. 졸업 후, 직장을 잡은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면서 오랜 세월 고 웃던 정살이를 비로소 끝낼 수 있었다.


“나올 때 뭘 가지고 나왔다고 했지?


짐이라곤 숟가락 두 개와 찹쌀 한 말이 고작이었던 걸 잘 알면서도 자꾸 들춰내려는 내 심보 참 얄궂다.


“시골 떠나기 전에 이모를 찾아갔었다고 했잖아."

“옆마을 부잣집으로 시집간 언니한테 인사 갔었지."


엄마는 다 떨어진 포대기에 나를 둘러업 이모집 대문 앞을 서성댔다. 초췌 모습의 동생을 반갑게 맞이한 이모는 당장 광문을 열고 자루에 쌀을 퍼담았다고 한다. 쌀자주를 들고 가는 언니의 뒤를 줄래 줄래 따라나서니 시장 포목점 앞이었다. 가게를 나올 때 엄마의 손에는 포대기가 들려졌다.


“글쎄, 언니가 포목점에 들어가더니 빨간 꽃무늬 포대기를 사주잖어.”


마는 너덜너덜 해진 포대기를 두고 서울 올라갈 일끔찍했었다고 한다. 외할머니도 친할머니도 관심 주지 않았던 그 불안한 마음을 헤아려준 이는 다름 아닌 이모였다.


“염치없이 덥석 받고 보니 어찌나 미안하고 고맙던지.”


애잔게 물결치는 이야기가 춥고 배고팠던 서울살이 로 접어들 무렵에 뚝 끊겼다. 큰 외숙모와 작은 외삼촌, 사촌 조카가 차례로 엄마의 안부를 걱정하는 전화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럼 시골에서 큰 외숙모랑 한집에서 살았겠네?”

“암, 동생 댁이 나 때문에 고생 참 많이 했지.”


큰 외숙모 입장에서 보면 시집오자마자  짐덩이였을까. 시부모 면서 결혼한 시누까지 거두려니 얼마나 힘에 부쳤을까. 더군다나 친정에서 낳은 나와 동생의 해산관 노릇까지 해주었참으로 감사하다. 또 엄마 입장에서 보 얼마나 눈치를 보며 살았을까.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자격지심에서 나오는 갈등으로 가슴이 요동쳤을 것이다. 오죽하면 '겉보리 서 말만 되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 옛말도 있지 않나. 아버지한테는 서러운 처가살이, 엄마한테는 마음 졸이는 친정살이였을 테다. 


넷째 딸을 낳은 엄마를 보려고 외할머니가 서울에 잠깐 오셨을 때다. 연탄 아끼려고 불도 때지 않는 궁핍한 삶을 목격한 할머니는 덥석 셋째 손을 잡아 이끌었다.  


“셋째는 내가 데려가서 키워주마.”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아장아장 걷던 네 살짜리 동생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할머니를 따랐다. 방문을 나서다가 “엄마도 같이 가." 하며 손을 잡는 걸 뿌리쳤다 대목에 이르러 목소리에 울음 섞여 나온.


“쌀 한 줌이라도 넣을 걸, 라면 죽만 먹여 보낸 것이 지금까지도 걸려.”


넋 빠진 사람처럼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고 있던 엄마를 야단친 사람은 주인집 아주머니였다.

“아이고, 이 여편네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왜 자식을 보냈어?”


각박한 서울살이에 겨우 목구멍에 풀칠하느라 지쳐가고 있을 즈음 그 마음을 헤아려 준 이는 다름 아닌 작은 외삼촌이었다. 자식은 많고 살아갈 길이 막막했던 엄마한테 60만 원이라는 돈으로 앞길을 열어 주었다.


외삼촌은 대학을 마치던 그 해에 교편생활을 시작하여 알뜰하게 돈을 모아두었다. 엄마한테 가게를 차려보라고 선뜻 그 돈을 빌려주었으니 은인이 아니고 무엇이랴. 가게를 차린 지 삼 년 만에 원금을 다 갚았을 정도로 엄마는 지독스럽게 리띠를 바짝 조였을 테다. 서울이라는 허허벌판에서 외가 도움 없었다면 온전히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까. 그 발판 위로 녹아내린 부모님의 물겨운 피땀으로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편안한 것이다.


침대 위에서 우리 둘만의 달콤한 소풍놀이를 시샘하는 훼방꾼이 또 전화벨을 울린다. 여기저기 사람밭  씨앗을 뿌려놓았더니 모두가 엄마의 건강을 염려고 있다. 늙으면 찾아오는 이 없어 고독과 씨름한다는데 엄마는 고독할 틈새가 보이지 않는다. 태생이 너그럽고 인정이 많기도 하지만, 틈틈이 명심보감을 읊으며 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기 때문이 아닐까.


드디어 엄마의 정확한 진단명이 나왔다. 심부정맥이 있고, 심장 기능이 떨어져 신장에 물이 찼는데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한다. 심장박동기만 달면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희소식도 들려준다. 건강한 피가 온몸을 휘돌면 예전처럼 맥박이 펄떡펄떡 게 된다고 말해준다. 힘차게 수액을 빨아올리는 저 나무들처럼 벌떡 일어나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사방이 커튼으로 둘러싸인 좁은 공간에서 오늘 단독으로 엄마를 밀착 취재했다. 호톳함은 물론, 끈끈한 애정 재확인하며 추억 한 자락으로 기억될 소중한 시간이었다.


어느 쪽을 둘러봐도 화사한 꽃잔치가 열리는 세상, 지금이 호시절이다. 혹독하고 매서운 추위를 견뎌냈기에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게 아닌가. 지금은 비록 병원에 있지만 하루빨리 꽃잎이 흩날리는 세상으로 진짜 소풍을 고 싶다. 소박한 이 바람이 이루어질 때까지 꼭 잡은 엄마 손을 절대 놓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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