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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Feb 15. 2023

써니를 위한 흔들의자

질투의 화신

   집들이에 다녀온 뒤부터가 분명하다.

  흔들의자가 내 머릿속을 꿰차고 들어앉아 꼼짝하지 않는 것은. 한강을 향한 베란다에 다소곳이 놓여있던 그것이 눈을 뜨자마자 또다시 어른거렸다. 뿌리쳐내려고 머리를 흔들어댈수록 더 힘 있게 착 달라붙는 이 증세는 과연 무얼까.


  선배 집들이에 초대를 받아 다녀온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실내 장식을 아주 근사하게 했다는 소문대로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주인의 개성과 취향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집을 알차게 꾸민 솜씨는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모자란 구석 없이 멋지게 디자인한 미적 감각에 입이 떡 벌어졌다. 우리는 입이 마르고 닳도록 집에 대한 평가는 물론 주인의 능력을 칭송하기에 바빴다.


  전통미가 우러나는 반닫이 위에 백자 항아리가 고풍스럽게 놓여있었다. 그 위로 벽에 걸린 자그마한 모란꽃 장식은 수십 년의 내력을 말해주는 친정어머니의 유품이라 했다. 군데군데 누렇게 빛이 바랬지만 사대부 여인네의 기품 있는 자태를 연상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어릴 적 외가에서 본 병풍 그림이 잠시 떠올랐다. 시집올 때 혼수품으로 가지고 왔던 할머니의 병풍에도 명주실로 곱게 모란꽃이 수놓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장식품마다 독특한 주제를 간직하고 있어 넉넉한 이야기꽃이 펼쳐졌다. 곳곳에 숨어있는 이야깃거리들이 바로 글의 소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한없이 부러웠다. 글 쓰는 사람에게 글감은 재물보다 더 귀한 재산이 되지 않겠나.


  스무 해 동안 고가구를 하나둘 수집하여 이만큼 장만하였으니 얼마나 뿌듯할까. 그 기쁨은 또 무엇에 비기랴. 이제 큰집으로 모아둔 것들을 옮겨와 진열해 놓고 가끔 지인들을 부른다고 한다. 이웃과 더불어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씀씀이에 내 마음도 덩달아 흐뭇했다.




  널찍한 식탁에 둘러앉아 전통차를 마시며 한강을 내다보았다. 은은한 차 향에 취해 주인을 위한 덕담이 무르익어갔다.

  “이런 집에 살면 화나는 일도 없을 것 같아요.”

  “아니지, 화가 나더라도 금세 풀리겠지.”

  재치 있는 말장난으로 맞장구를 치는 바람에 우리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다 보면 한 길 사람의 속까지 훤히 꿰뚫을 정도로 소통이 잘 될 것만 같았다. 강변의 멋진 야경까지 덤으로 얻는다면 어느 누구의 가슴에 옹졸함이 자리하겠는가.


  집을 다 둘러볼 때까지도 소개받지 않은 빈방 하나가 궁금해졌다. 아무런 장식 없이 바닥에 수건만 깔려있고, 그 위에 예쁜 사기 밥그릇 두 개가 놓여있는 게 이상했다. 하나에는 동글동글한 모양의 과자 같은 것이 담겼고, 다른 쪽에는 맑은 물이 반쯤 담겨있었다.


  ‘왜 방바닥에 밥그릇을 두 개씩이나 놓았을까?’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방과 통해 있는 베란다에 흔들의자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이 방에도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을 내다볼 수 있었다.


  “베란다에 앉아 매일 사색하시나 봐요?”


  편안하게 쉬기에 안성맞춤이었고, 하얀 흔들의자가 그렇게 말해주었다. 묻는 말에 역시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 누군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사색하는 자리까지 전용으로 두시다니 정말 부럽네요.”


  선배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내가 아니라 우리 써니가.”


  써니라면? 선배가 끔찍이도 아끼는 털이 복슬복슬한 갈색 강아지가 아닌가. 베란다까지 딸린 이 빈방의 주인이 강아지라고? 이렇게 큰집에 강아지 방 하나쯤 마련해 두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일까마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써니는 주인 잘 만나서 참으로 호강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론 개를 상전으로 모시는 사람한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내색하지는 않았다. 동료들도 ‘개 팔자가 사람보다 낫네.’라고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예를 차리느라 차마 바깥으로 표현하지만 않았을 뿐.  


  유치원에 간 써니가 하교할 시간이라고 서두르는 선배와 함께 우리는 집을 나왔다. 조금 전까지 얼굴 가득 웃음짓던 표정들이 조금씩 어두워지면서 무슨 말인가 할 듯 말듯하다가 서로 헤어졌다.


  집들이를 갔다가 강아지도 유치원을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애견 카페’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강아지 전용 호텔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하기야 요즘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유모차를 들여다보면 아이보다 강아지일 확률이 더 높으니 말해 무엇하리. 강아지에 대한 대우가 이토록 극진한 세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나의 무딘 현실 감각을 탓했다.  


  집들이 다녀온 지 일주일이 넘어가는데 내 머릿속에 들어앉은 흔들의자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는다. ‘강아지 전용 사색의자’가 자꾸만 눈에 밟혀 멍해지는 이 증세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써니는 오늘도 그곳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늘도 내 안에 갇힌 의자를 털어내려고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대던 중,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강아지를 질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뒷걸음질까지 칠 뻔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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