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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Feb 12. 2023

불청객이여, 느릿한 걸음으로 오소서

다시 찾게 된 사탕

   나는 외출할 때마다 가방 속에 필수품처럼 챙기는 게 하나 있다. 옥양목 바탕에 분홍 진달래꽃이 수놓아져 있는 예쁜 주머니다. 그 속에는 언제나 알록달록한 사탕 몇 알이 들어있다.


  어린 시절, 여느 아이들처럼 나도 사탕을 좋아하는 축에 끼었었다. 어쩌다 생긴 동전을 들고 구멍가게로 냅다 뛰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바스락거리는 비닐을 채 벗겨내기도 전에 입 안 가득 침부터 고였다. 고것이 내 안으로 쏙 들어오는 순간, 달콤한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단물을 빨아들이면 마음이 순해지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단물이 스며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몽글몽글 피어났다.

 

  하지만 금세 사탕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때는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입안에 사탕을 오래 붙잡아둘 비법을 찾아냈다. 혀를 아주 천천히 굴려야 하는 법, 절대로 깨물어서는 안 된다는 나만의 법칙이 생겼다. 무의식 중에 깨물기라도 하면 ‘와드득’ 소리와 함께 행복은 파랑새가 되어 저 멀리로 날아가버리고 만다. 지금도 사탕을 천천히 녹여먹는 습관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코흘리개 일 학년 때, 엄마가 콩나물 십 원어치를 사 오라며 돈을 주신 적이 있다. 수줍음이 많던 내 앞에 옆집 친구가 나서더니 팔짱을 끼며 함께 가자고 했다. 나는 십 원짜리 지폐를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봐 주먹을 꽉 틀어쥔 채 시장으로 갔다.


  한참을 걸어 시장 입구에 다다르자 갑자기 친구가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는 내 주먹 안에 든 돈을 잽싸게 낚아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돈을 되찾으려 양팔을 쭉 뻗었다. 입을 앙다문 친구는 이리저리 팔을 휘돌리며 악착같이 버텼다.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던 끝에 힘이 빠져버린 쪽은 나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 틈에 친구는 내게로 바짝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우리 콩나물 오 원어치만 사고, 남은 돈으로는 사탕 사 먹자. 응?”


  나를 우습게 본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어지러울 정도로 고개를 양옆으로 힘껏 저었다. 엄마 얼굴이 떠올라 눈물까지 핑 돌았다.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두 번째의 유혹이 다시 귓가를 스쳤다.


  “야, 콩나물 오 원어치나 십 원어치는 비슷하단 말이야.”


  여태 그것도 몰랐냐는 듯 비웃으며 자꾸만 보챘다. 친구를 이겨낼 재간이 없어서였을까, 흘끔흘끔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부끄러워 서였을까. 결국 나는 검은 유혹 앞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5원어치 콩나물 봉지를 휙 던져준 친구는 거스름돈을 제 것처럼 받아 챙겨 쏜살같이 구멍가게로 뛰어갔다. 어쩔 수 없이 친구의 뒤꽁무니를 좇는 신세가 되었지만 사탕을 공평하게 나눠 받은 것은 다행이었다. 우선 한 개는 입 안에 넣고, 나머지는 얼른 주머니에 넣었다. 단물이 입안으로 스며들자 역시 마법의 힘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가슴이 활짝 펴지면서 초조함이 사라졌다.


  한참을 걸어 집 앞에 이르자 친구는 제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때부터 발목에 추가 매달린 것처럼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축 늘어진 몸을 간신히 집안으로 들이밀고 봉지를 쑥 내밀었다. 콩나물을 받아 든 엄마는 중얼거렸다.


  “애걔걔, 콩나물 십 원어치가 겨우 요거야?”


  혼잣말이 분명한데도 가슴이 뜨끔했다. 엄마는 허공에 손저울을 하나 만들더니 이내 콩나물을 올려놓고 재는 시늉을 했다.


  “어라, 정말 이상한데?”


  내 손저울은 언제나 정확해, 하면서 당장이라도 따지러 갈 기세였다. 봉지 안까지 샅샅이 살피는가 싶더니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는 바람에 찔끔 오줌을 지릴 뻔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네가 한 일을 다 알고 있으니 이제 순순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주머니를 본 것일까. 아니면 주머니 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가는 손을 본 것일까. 어쩌면 핑그르르 흔들리는 눈빛에서 감을 잡았을 수도 있었다. 결국 유혹이 낳은 달콤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호된 꾸지람만 오래도록 이어졌다.


  나를 울리고 웃게 하던 그 사탕과 요즘 다시 친해지고 있다. 입안이 자꾸 말라 물로 다스려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입놀림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건조증이 심해지면 민망스럽기조차 하다. 불편한 것은 어느 정도 참아낸다지만 벌게진 얼굴빛까지 숨기는 건 쉽지 않다. 이런 남모르는 고민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 준 것이 바로 사탕이다. 남몰래 사탕을 까서 입에 물면 침이 돌면서 입안이 부드러워지고 평정심을 되찾는다. 누가 알았으랴. 어렸을 적에나 좋아하던 그 사탕을 이 나이에 다시 찾게 될 줄을.


  얼마 전, 고민 끝에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월이 주는 현상이라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환자의 표정을 읽었는지 의사는 다시 한번 직격탄을 쏘았다.  

  

  “노화의 현상입니다.”


  측은지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메마른 목소리였다.

  노화라는 불청객이 드디어 내 주변을 서성대기 시작했나 보다. 냉정하게 쫓아버리고 싶지만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세월을 이길 장사 없다고 했으니 마음을 비우는 수밖에 없다. 한 가닥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그 불청객이 사탕을 녹여 먹는 나의 느긋한 심성이나 쏙 빼닮았으면 좋겠다.


  ‘불청객이시여, 오려거든 느릿한 걸음으로 천천히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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