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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Mar 27. 2023

나는 조선 여인이로소이다

개화기 급물살에 올라타자   

   새벽 2시, 배가 살살 도는 느낌이 들었다. 곤히 자는 남편 몰래 고양이 걸음으로 살그마니 부엌으로 갔다. 수도꼭지를 최대한 가는 물줄기 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쌀을 씻었다. 콩나물을 다듬는 도중에 또 한 번 배가 아파왔다. 불안감은 온몸을 덮치는데 손놀림에는 오히려 가속이 붙다니 이상한 노릇이다. 아침 준비를 모두 끝낸 시각은 3시경. 


이불속으로 살포시 들어가 숨을 죽였다. 시간은 왜 그리 더디 흐. 한 시간쯤 지났을까. 진통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고양이 눈으로 더듬거리며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양손으로 수화기 구멍을 감싸 쥐며 소곤거렸다.


 “엄마, 이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나 없이도 잘 돌아갈까 염려하며 집안을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 불룩 나온 배를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면서. 

택시를 타고 한걸음에 달려온 엄마는 초인종 대신 문을 두드렸다. 자는 사람을 위한 배려였지만 웅성거리는 소리에 남편은 눈을 떴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비비던 사위에게 엄마는 얼른 더 자라고 손짓했다.  

 

  “아침 꼭 챙겨 먹고 출근하게.”


이 한 마디 남긴 엄마는 어둠 속으로 곧장 빨려 들어갔다. 엉겁결에 허리를 굽힌 남편은 문 앞에 서서 우리를 배웅했다.

  

간호사가 길게 하품을 하며 병원 문을 열어 주었다. 침상에 누워 쳐다본 벽시계 4시 30을 가리켰다. 천장에 달린 커다란 조명환하게 빛을 뿜어댔다.

  ‘드디어 엄마가 되는 거야.’

한 줄기 빛은 가슴을 두드리는 설렘이었고, 또 한 줄기는 떼 지어 몰려드는 두려움이었다.

  ‘하늘이 노래져야 한다는데 과연 어떤 느낌일까?’

  

종합병원에서는 예정일이 지나 수술이 급하다며 메스를 들고 덤볐다. 뱃속에서 잘 키운 아이 사산시킬 거냐며 으름장까지 놓았다. 엄마는 꼭 자연분만을 해야 한다며 믿을 만한 개인병원을 찾아냈다. 의사는 3일 안에 진통이 오면 괜찮다고 안심하라 했다. 내 일생에서 가장 길고도 가슴  떨리는 사흘 간의 낮과 밤이었다. 온 신경세포가 시곗바늘을 향해 곤두선다는 것은 일종의 고문과도 같다. 쓰디쓴 약을 머금은 듯 초조함을 견뎌낸지 사흘 만에 기적처럼 진통이 찾아다.

 



몇 분간 용을 썼다가 진정하기를 되풀이하면서 하늘이 빨리 노래지기만을 기다렸다. 축 늘어진 몸을 다시 추스르면서 이를 악물었다. 아기의 생명 줄을 쥔 내 정신이 꼿꼿해야 했다. 어미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한들 여리 여린 아기의 고통과 어찌 견주랴.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생사의 갈림길에서 숨을 헐떡이며 안간힘을 쓰고 있을 우리 아기한테 너무 미안했다.

  

  “머리가 커서 쉽지 않겠는 걸.”

  

눈앞이 캄캄했다. 수술을 해야 하나? 깊은 고민 속에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하늘은 분명 샛노래졌는데 도무지 끝날 기미 없어 불안했다. 정오가 되도록 몇 번의 용트림이 더 있었지만 다시 제자리였다. 진땀을 흘리던 의사가 촉진제를 쓸 수밖에 없다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결국 배 위로 올라탄 간호사까지 세 명의 의료진이 아기를 강제로 빼내다시피 했다.


뭉텅! 의사의 손에 거꾸로 매달린 아기는 온몸이 푸르뎅뎅했다. 자동으로 뒤따라야 할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만 울렸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긴장과 체념으로 입안이 바짝 타들어갔다. 목구멍에 긴 줄을 넣어 누런 양수를 빼내고 나서야 울음이 터져나왔다.


“응애응애!”

  

병실을 울리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푸르뎅뎅하던 아기 몸이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3.8킬로그램, 왕자님을 낳으셨습니다.”


문틈으로 줄곳 엿보고 있던 엄마가 두 다리를 뻗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딸 다섯을 내리 두어 첫 손자를 고대하던 친정엄마. 혹여 잘못되지나 않을까 문고리 잡고 꼬박 서서 천지신명께 빌었을 테다. 긴장이 풀리면서 내 눈도 스르르 감겼다.  


저녁 늦게 남편이 과일을 사들고 병원으로 퇴근했다. 회사일이 여의치 않아 달려오지 못했다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세상을 얻은 듯 벅찬 가슴으로 아기를 안으며  ‘닮았’를 연발했다.

딸을 낳을 때에도 아픈 배를 움켜쥔 채 살그마니 아침 준비를 했다. 잠이 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남편인데 깰까 봐 조심조심하면서. 엄마 또한 병원을 향하면서 사위가 아침을 굶을까 염려했다. 회사에서 퇴근한 남편은 딸한테 눈을 떼지 않고 신기한 듯 ‘예쁘다’를 연발하며 웃었다.

    


 

 출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속이 터진다고 가슴을 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빙긋이 웃기만 한다.


  “세상에, 조선 여인이 따로 없네.”

 

그때부터 나는 ‘조선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현대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 한 마디로 구식 물이 뚝뚝 떨어진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내게도 개화기의 훈풍이 불어오려는 조짐일까. 요즘들어 ‘너무 미련하게 살았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진통하는 순간에도 왜 아침식사를 걱정했을까. 건장한 남편이 있는데 왜 엄마와 병원에 갔을까. 옛일을 들먹이며 입을 쑥 내미는데 남편이 속죄의 표정을 짓는다.


“앞으로는 내가 잘할게.”

  

개화기의 급물살에 올라탈 절호의 기회는 바로 이때인가 하노라.


“이 영혼, 바람 가는 대로 자유여행 한번 다녀오고 싶소.”

십 년을 조선 여인으로 살아왔으니 신여성으로 가고자 하는 길목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터 주겠지? 암,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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