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시절로 돌아간다면?
“엄마는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얼 하고 싶으세요?”
뜬금없이 묻는 아들의 말에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 아무리 골똘히 집중해 봐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아 머뭇거리기만 했을 뿐. 현재에 만족하고 있다는 건가. 그래서 예전으로 되돌아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건가. 시곗바늘을 젊은 시절로 돌려놓은 뒤,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다만 똑딱거리는 시계가 전력질주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저 걷는 듯 멈춘 듯 천천히 달팽이 걸음으로 가면 그뿐이다.
돌이켜 보건대 내 스무 살 시절은 꽃비가 내릴 만한 꽃구름이 하늘 위로 두둥실 떠다니지는 않았다. 학교 근처 강물의 흐름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강물을 거슬러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나날을 보냈다. 특히 비 오는 날이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강물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고 그냥 멍하게 앉아있는 상태가 좋았다. 나랑은 상관없다는 듯, 강물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경쾌한 왈츠 리듬을 탔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것은 그나마 절망을 접어둔 셈이라 할까.
내 주위에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깔깔대던 친구들이 많았다. 여고 시절부터 검은 휘장처럼 온몸을 휘감았던 우울감을 훌떡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세상을 부정적인 잣대로 보는 아이는 아니었다. 나의 관심은 오로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 부호 투성이었다. 정답 없는 물음표만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다 보니 고뇌에 찬 표정이 나를 대변했다.
전혜린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책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것도 그 시절이었다. 쇼펜아워의 사상에 빠져 고독한 성을 높이 쌓아둔 것도. 얼굴에는 웃음을 실었지만, 고뇌의 칼날을 숨겨 둔 채 염세주의자들과 비밀리에 만남을 지속하던 때였다. 젊은 나이에 왜 그런 염세주의자들과 은밀한 내통을 하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선천적으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의 온전한 사랑을 몽땅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건 아니었을까.
염세주의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게 된 것은 학교의 아이들을 만나고부터다. 티 없이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들을 만나고부터 다시는 강가를 거닐지 않았다. 강가를 찾을 여유나 한가함이 없었다. 맑은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매일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교실생활은 세상의 어떤 모습보다 즐거웠기 때문이다. 우수에 젖은 모습으로 강가를 거닐던 나의 과거를 눈치챈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서울 변두리 지역 학교라 고아원에서 오는 아이들이 몇 있었다. 부모의 손이 닿지 않는 아이들의 머리를 빗기고 돌보느라 하루가 후딱 지나갔다. 일기장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으며 적극적인 애정을 쏟느라 하루가 짧았다.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놀다 보면 어느새 산허리에 붉은 석양 노을이 지고 있었다.
6학년을 맡은 지 몇 달 만에 과로로 병원에 입원했다. 급성 간염으로 한 달간을 종합병원에서 누워있었다. 병원에 누워서도 내 머릿속에는 온통 아이들 생각뿐이었다. 푹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도 틈틈이 일기와 편지를 쓰곤 하였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그 마음을 일기로 남기고 편지로 표현하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인데 과로로 입원했대.”
“젊은 처녀가 몸도 약하기도 하지.”
나에 대한 소문이 병원에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나의 심장만큼은 경쾌한 리듬을 타고 힘차게 뛰고 있는 사실을.
선생님이 꿈이었던 나는 아이들이 좋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이들 곁에 머물고 있다. 앞으로도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이 자리를 지키고 싶다. 아무리 교실 분위기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해도 우리 아이들은 내게 기쁨이자, 희망을 주는 원천이다. 누가 뭐라 해도 마지막까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교사가 되고 싶다.
아들이 묻는 물음의 속뜻을 나는 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처럼 아들은 지금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진로 문제로든 이성 문제로든 한창 고민이 많을 때다. 마음에 무거운 추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답답한 순간도 많겠지. 오죽 답답했으면 엄마의 이십 대는 어땠을까 슬쩍 물어볼 텐가. 청춘은 수없이 고뇌하고 번민해야 해답이 나오고, 그때야 비로소 분명한 제 갈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건강한 아픔으로 명쾌한 답을 찾아낼 때까지 이 엄마는 묵묵히 기다려 주마.'